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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 본기 1

완역 사기 본기 1

사마천 저 / 김영수 | 알마 | 2020년 10월 2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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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600쪽 | 818g | 152*232*37mm
ISBN13 9791159923210
ISBN10 115992321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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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사기》 집필을 위해 역사 현장을 여러 차례 탐방했다. 첫 여행은 기원전 126년 전후 사마천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약 2년 넘게 거의 전국을 떠도는 대장정이었다. 이 여행으로 사마천은《사기》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은 물론 세상과 인간을 보는 안목을 갖출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사마천은 무제를 수행하여 여러 차례 전국 각지를 다녔다. 그의 여행 범위는 당시 한나라 전체에 미치고 있으며, 이 여행을 통해 입수한 생생한 현장 자료들이 《사기》에 반영되었다.
--- p.27

자신이 직접 겪은 ‘이릉의 화’로 《사기》의 정신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말과 행동에 신의가 있고, 불의를 보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가는 유협의 존재들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사소한 이익 때문에 친구를 저버리고 은혜를 갚기는커녕 복수로 되돌려주는 배은망덕한 소인배들을 강렬하게 증오한다. 또한 서로를 알아주는 참된 우정을 나눈 인물들을 칭찬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후 남은 삶의 전부를 《사기》의 완성에 두고 후세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훼손시킨 자들에게 시위하고 복수하고자 했다. 그는 ‘인문人文 정신의 위대한 승리자’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사기》 완성 이후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의 문장에 몸을 떨었으며, 부당하게 박해받았거나 박해당하는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문장을 무기삼아 저항했던가? 《사기》는 참된 삶과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고자 하는 지식인의 최고 무기이자 힘이 되어 영생을 얻었다.
--- p.44

서양의 대표적인 《사기》 연구자인 버튼 왓슨Burton Watson은 《사기》의 형식으로 미국사를 쓸 경우 어떻게 기술될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사기》의 서술체제가 역사가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형식이라고 평가했다. 왓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사기》 이후 이른바 ‘정사正史’로 분류된 중국의 관찬 역사서들은 물론 그 밖의 중국과 동양의 많은 역사서들이 2,000년 넘게 《사기》의 기전체를 답습한 사실만 보아도 《사기》의 형식이 얼마나 큰 장점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사마천은 넓고 복잡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은 중국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남다른 형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그 결과가 바로 기전체다. 사마천은 그 전까지의 각종 기록들을 두루 섭렵한 다음 이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종합한 끝에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역사서를 창조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왓슨의 표현대로 사마천의 이런 해결책은 창조적 걸작으로 환영받았고, 이어서 후대 중국사 서술에 있어 정사의 모범이 되었다.
--- p.80~81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았다.
“《시》나 《서》의 뜻이 함축적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서였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다. 손빈은 빈각이란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 편을 저술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요임금에서 ‘획린’에 이르는 긴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황제부터다.
--- p.113~114

이에 천하에 흩어진 오랜 이야기들을 두루 모아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결론을 지었다. 삼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한은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本紀’로 저술되었는데 모두 나름대로의 뼈대를 제시했다.
사건은 많은데 발생한 시간이 달라 연대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다. 그래서 10편의 ‘표表’를 지었다.
예악의 증감, 율력의 개역, 병가의 지혜와 모략, 산천 지리의 형세, 귀신에 대한 제사, 하늘과 인간의 관계, 각종 사물의 발전과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書’를 지었다.
28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살 30개가 바퀴 안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의 충성스러운 행동과 주상을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世家’에 담았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남긴다.
이렇게 해서 총 130편 52만 6,500자에 《태사공서太史公書》라는 이름을 붙였다. 간략한 서문을 통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빠진 곳을 보충하여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6경의 다양한 해석을 취하고, 제자백가의 서로 다른 학설도 절충하였다. 그리하여 정본은 명산에 감추어 두고, 부본은 서울에 남겨 나중에 성인군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열전의 마지막 편인 제7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이다.
--- p.138~139

그러나 때로는 명목상 제왕은 아니지만 실제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들도 본기에 편입되어 있다. 사마천은 표상이 아닌 사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항우와 여후가 본기에 들어간 것이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정이나 유지기劉知幾 같은 대학자조차 사마천을 비판했다. 제왕의 기록에 제왕이 아닌 인물과 자격이 없는 인물을 넣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후대 사가들의 자의적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마천은 본기라는 명칭만 썼을 뿐 꼭 제왕만을 기록해야 한다는 기준을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 사마천은 본기를 통해 그 사람이 제왕이든 아니든 천하대세를 주도했다고 판단하면 그 사람을 역사 사건의 중심인물로 삼아 거기에 논술을 덧붙이고, 동시에 그들의 전후 계승 관계로 역사의 발전을 드러내어 이것으로 전체 역사를 종합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 p.156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다. 천인감응天人感應 따위와 같은 미신적 신학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사마천은 황제를 중국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한편, 황제를 신격화하는 황당무계한 설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황제를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렸다. 이로써 중국사는 황제로부터 진정한 인류 사회의 역사가 되었다. 사마천이 〈오제본기〉의 시작으로 황제를 선택한 것은 신선을 찾아다니고 방사를 우대하면서 불로장생을 갈망한 무제의 말도 안 되는 행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도 읽힌다(이런 비판적 인식은 〈봉선서〉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즉 무제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된 황로술이나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권력자에게 아부를 떠는 방사들에 의해 동원된 황제를 당당히 인간 세상으로 환원
시켜 인간사와 연계시킴으로써 이들의 짓거리를 통렬하게 공격한 것이다. 요컨대 《사기》는 철두철미 인간의 일을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 p.173~174

순은 나이 스물에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서른에 제요가 쓸 만한지 묻자 사악은 한결같이 좋다며 우순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요는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집안에서의 행동을 살폈고, 아들 아홉을 보내 함께 살게 하여 바깥에서의 행동을 살폈다. 순은 규예에 살면서 가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했다. 요의 두 딸은 고귀한 신분이라 해서 순의 부모와 친척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부녀자의 도리를 다했다. 요의 아홉 아들도 모두 전보다 더 독실해졌다.
순이 역산에서 농사를 짓자 역산 사람들이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다.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자 뇌택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리를 양보했다. 황하 언저리에서 그릇을 굽자 그곳 그릇은 모두 단단한 것만 생산되었다. 순이 1년을 살자 마을이 형성되었고, 2년을 살자 읍이 생겼으며, 3년을 살
자 도읍이 되었다. 요는 순에게 갈포로 만든 옷을 하사하고 거문고를 주었다. 창고를 지어주고 소와 양도 내렸다.
--- p.200~201

〈하본기〉 전체를 관통하는 정치적 기조는 덕에 힘쓰라는 ‘무덕務德’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덕을 베풀면 흥하고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는 덕치의 논리다. 이는 중국식 통치론의 원형질을 형성한다. 사마천은 특별히 고요를 등장시켜 통치자의 자질, 즉 ‘덕’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신하의 모습으로서 고요를 부각시킨다. 이는 사마천이 직접 경험했던 자기 시대 황제와 그 앞잡이 혹리들의 잔혹한 통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내포한다.
우의 공적을 집중적으로 수록한 〈하본기〉는 ‘중화中華’의 원형질로 거듭나고 있다. 우의 구주는 천하 개념이자 중국 개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夏’는 중국이요, 중국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발전한다. ‘하’는 또 나아가 ‘제하諸夏’나 ‘화하華夏’로 표현되면서 중화대일통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 이런 점에서 〈하본기〉는 처음부터 정치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휘둘릴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이런 위험성은 최근 중국이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역사 새로 쓰기’ 공정에 의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이는 〈오제본기〉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전 세계를 향한 중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 p.239

제수濟水와 황하 사이는 연주?州에 해당한다. 아홉 개의 하천이 모두 소통되었고, 뇌하택雷河澤은 큰 호수가 되니 옹수雍水와 저수沮水가 합류하여 호수로 흘러든다. 그 땅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니 백성들이 언덕 아래 평지로 옮겨 살 수 있게 되었다. 흙은 검고 기름지며, 풀과 나무는 무성하게 잘 자란다. 밭은 중하로 6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9등급이었으나 13년 동안 잘 다스려 다른 주처럼 되었다. 옻나무와 견사, 대바구니에 담는 무늬가 있는 견직물과 같은 특산물을 공물로 보냈는데, 제수와 누수?水에서 배로 황하를 통해 운반했다. (……)
바다와 태산?회수淮水 사이는 서주徐州에 해당한다. 회수와 기수淇水를 다스리니 몽산蒙山과 우산에 곡식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대야택大野澤이 호수가 되니 동원東原 지역은 낮은 평지가 되었다. 토질은 붉고 기름진 점토이고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밭은 상중 2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중중 5등급이었다. 오색토와 우산 계곡에서 나는 꿩, 역산?山 남에서 자라는 특산 오동나무, 사수泗水 언저리에서 나는 부석으로 만든 석경, 회이淮夷의 진주와 어류, 대광주리에 담은 검은색 견직물과 같은 특산물들은 회수와 사수에서 배로 실어 황하를 통해 운송되었다.
--- p.257~258

〈은본기〉는 대량의 문자를 기록한 갑골이 나온 은나라 마지막 수도 은허殷墟의 발굴을 계기로 공백이 많은 중국 상고대사의 위아래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한 예로 대표적인 갑골문 학자인 왕국유王國維는 《은대 복사에 보이는 선왕 선공에 대한 고찰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이란 논문과 그 속편에서 은대 제왕의 이름과 세계를 고찰한 결과 본기〉?〈삼대세표〉와 갑골문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써 사마천이 인용하거나 참고한 자료가 대부분 사실이며 정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은은 처음에는 상이라 불렀다. 반경이 은으로 천도한 다음 비로소 은이라 불렀다. 지금은 대개 상은商殷 또는 은상殷商이라 부른다. 〈은본기〉는 은왕조의 흥기와 발전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역사과정을 계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분량 면에서는 〈하본기〉보다 적은 편이다. 사마천이 활용한 자료의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은허 갑골문의 발견으로 은의 역사는 보다 충실해지고 있다.
--- p.301~302

탕이 하에게 승리하고 사직을 옮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하사夏社〉를 짓고, 이윤이 성명을 발표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했다. 탕은 마침내 천자 자리에 올라 천하를 평정했다. 탕왕이 돌아오는 길에 태권도泰卷度에 이르자 중뢰中?가 포고문을 지었다. 탕은 하의 통치를 끝장내고 박으로 돌아와서 〈탕고湯誥〉를 지어 제후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3월에 왕이 동 교외에서 제후국의 국군들을 향해 “백성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려면 부지런히 간절히 그대들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라고 알렸다.
또 “그 옛날 우와 고요는 오랫동안 밖에서 일하며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이 동의 장강, 북의 제수, 서의 황하, 남의 회수 등 사독을 잘 다스림으로써 만민이 살 수 있게 되었다. 후직은 천명을 받고 농사짓는 방법을 전수해서 온갖 곡식들을 힘써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이 세 분이 백성들을 위해 공을 세웠기에 그 후손들은 땅을 받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치우가 대부들과 함께 백성들을 향해 난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그를 돌보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 선왕의 말씀은 힘써 받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 “무도한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로써 제후들에게 알리니 이윤은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었고, 고단咎單은 〈명거明居〉를 지었다. 탕은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흰색을 숭상했으며 낮에 조회를 열었다.
--- p.322~323

춘추시대로 접어들면 주 왕조의 사적 분량은 현저히 떨어지고 왕조의 기년으로 천하 대사의 줄기를 잡아 제후간의 분쟁을 주로 기록한다. 이러한 기술은 춘추시대 천자, 제후, 경사간의 권력 이동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국시대는 주 천자와 제후 간 역전된 관계의 추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춘추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여왕의 폭정으로 인해 폭발한 기원전 841년의 ‘국인반정國人反政’은 주의 쇠퇴를 알리는 중대한 사건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왕은 국인에게 쫓겨나 14년 동안 도망 다니다 타지에서 죽었다. 이 사건은 주 왕실에게도 중대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 이래 중국 역사에서도 중대한 사건으로 꼽힌다. 주 왕조가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자 봉건제도 자체가 붕괴되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연대가 정확하게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다.
--- p.360

주는 인척이나 공신들을 지방에 봉해 자신의 제도와 문화를 전파했다. 이것이 봉건이고 분봉된 자를 제후, 분봉된 땅을 봉지라 불렀다. 제후는 주 왕실과 군신관계를 형성했고, 제후는 자신의 봉지에 살고 있던 토착민과의 연합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졌다. 제후는 왕실에 대해 군사를 비롯한 약간의 의무만 있을 뿐 거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주 왕실의 제도와 문화를 제후에게 전면 위임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봉건제도의 치명적 결함은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결속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고, 춘추시대는 바로 이런 결함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주의 봉건제도를 현대 기업에서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와 같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에 비유하는 학자도 있다. 체인점(제후)은 본사(주 왕실)의 햄버거나 커피 같은 특정 상품(주 왕실의 제도와 문화)을 반드시 팔되, 본사에 권리를 위임하고 간판을 사는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주의 봉건제도와 흡사하다고 본 것이다(쉬저윈, 《CEO를 위한 중국사 강의》).
--- p.363~364

공계가 죽고 아들 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서백西伯이다. 서백은 문왕文王이다. 서백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잘 따르고 고공단보와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어진 정치에 힘쓰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후배들을 아꼈다. 유능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예로 대하고, 정오가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선비들을 접대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고죽孤竹에서 서백이 노인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함께 서백에게로 왔다. 태전太顚, 굉요?夭, 산의생散宜生, 육자?子, 신갑대부辛甲大夫 등이 모두 그에게로 왔다.
숭후호崇侯虎가 은의 주紂임금에게 “서백이 선과 덕을 쌓아 제후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앞으로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며 서백을 모함했다. 제주는 곧 서백을 유리?里에 가두었다. 굉요 등이 걱정이 되어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여융驪戎의 준마, 유웅有熊의 수레 아홉 대를 끌 수 있는 필의 말을 다른 기이한 물건들과 함께 구해 제주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비중費仲이란 신하를 통해 제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이것 하나 로도 서백을 풀어주기에 충분하거늘 하물며 이렇게 많은데!”라고 했다. 이에 서백을 사면하고 활과 화살 그리고 큰도끼를 주어 서백이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서백을 모함한 자가 숭후호지, 아마!”라고 했다. 서백이 낙수洛水 서 땅을 바치며 포락형의 폐지를 요청하자 주는 허락했다.
--- p.382~383

목왕이 견융을 정벌하려 하자 제공祭公 모보謀父가 이렇게 간했다.
“안 됩니다. 선왕들께서는 덕을 드러냈지 무력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무력이란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한 때 사용하는 것으로 한 번 움직였다 하면 위세를 보여야 합니다. 아무 때나 무력을 과시하는 것은 장난이 되고 장난으로 무력을 휘두르면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공의 노래에서도 “창과 방패를 거두어들이고 활과 화살을 자루에 넣었네. 훌륭한 덕을 닦
아 온 나라에 실행하고, 왕도로 천하를 보존하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선왕들께서는 백성들에 대해 덕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데 힘을 썼고, 백성들의 재산을 늘리고 기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게 했으며, 이해관계의 소재를 분명히 알게 했습니다. 또 예법을 수양하게 하고, 이익을 꾀하고 손해를 피하게 했으며, 덕을 마음에 두고 벌은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천하를 보전하면서도 날로 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들께서는 대대로 후직 벼슬을 맡아 우순?하우에게 종사했습니다. 하가 쇠락하면서 후직 벼슬을 없애고 농업에 힘쓰지 않아 우리 선왕 부줄은 관직을 잃고 스스로 융적 사이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태만하지 않고 늘 선왕의 미덕과 전통을 지키려 했습니다. 선왕의 전장제도를 삼가 받들되 하루 종일 애를 쓰고 돈독함을 유지하면서 충성과 믿음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대로 덕을 행하여 선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왕과 무왕에 이르러서는 선대의 광명을 환히 밝혀 더욱 자애롭고 화목하게 신을 섬기고 백성을 보호하니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왕제신이 백성에게 큰 죄를 지어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기쁜 마음으로 무왕을 추대하니 상의 목야에서 정벌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왕께서는 무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에 정말 가슴이 아파 그 해악을 제거한 것일 뿐입니다 …….”
--- p.401~402

중국 고대사의 시대 구분에서 가장 큰 기준은 누가 뭐래도 기원전 221년 최초로 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秦 제국이다. 그래서 진을 기점으로 그 이를 따로 떼어서 ‘본기’로 편입한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진본기〉). 사마천 당대에도 진이 폭력적 수단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문화와 사상을 탄압한 것을 두고 진의 정통성과 그 존재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천하대세를 좌우한 나라나 인물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본기에 편입시키는 큰 원칙을 고수했다. 사마천은 이런 점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진을 비난하는 지식인들을 두고 ‘귀로 음식을 먹으려는(이식耳食)’ 자들이라고 비꼬고 있다. (……)
요컨대 사마천이 〈진본기〉와 〈진시황본기〉를 합치지 않고 따로 떼어 기술한 의도는 천하 통일 이전의 ‘오제-하-상-주’에서 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진의 역사적 위치와 역할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덕德으로 다스리는 통치방식을 중시하던 시대에서 힘을 중시하는 시대로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했기에 사마천은 서슴없이 〈진본기〉를 따로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465~466

5년, 진晉 헌공獻公이 우虞와 괵?을 멸망시키고 우의 군주와 그 대부 백리해百里?를 포로로 잡아왔다. 백옥과 좋은 말을 우의 군주에게 뇌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백리해를 포로로 잡아서는 목공의 부인이 시집올 때 종으로 딸려 보냈다. 백리해는 진으로 오던 중 완宛으로 도망갔다가 초의 변방 촌사람에게 붙잡혔다. 백리해가 능력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안 목공은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데려오려 했으나, 행여 초나라 사람이 내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사람을 보내 “내 폐백으로 딸려 온 노예 백리해가 거기에 있는데, 검정 숫양의 가죽 다섯 장으로 몸값을 치르고자 한다”라고 전하게 했다. 초나라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해를 놓아주었다. 이때 백리해의 나이 일흔이 넘었다.
--- p.493

39년(기원전 621년), 목공이 죽어 옹에 안장했다. 177명이 따라 죽었는데,29 진의 훌륭한 신하였던 엄식奄息, 중항中行, 침호鍼虎와 같이 자여씨子輿氏 세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애도하며 〈황조黃鳥〉라는 시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진 목공이 영토를 넓히니 속국이 늘었다. 동으로 강력한 진을 굴복시켰고, 서으로 융 지역을 제패했다. 그러나 그러고도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 것 또한 당연했다. 죽은 뒤에 백성을 돌보지 않고 유능한 신하들을 그와 함께 순장했기 때문이다. 고대 성왕들은 세상을 떠날 때 늘 좋은 제도와 법을 남기고 가려고 했거늘, 하물며 착한 사람과 유능한 신하를 산 채로 죽였으니 백성들이 그들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를 보면 진이 동방을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노라.”
--- p.50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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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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