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할아버지의 방이라니요?”
아들이 물었다.
“그래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히지만 영은 사람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주 자유롭게 돌아다니시지. [……] 사람들은 땅에서는 자기 방을 만들며 살아가지만, 죽어서는 모든 공간이 영들이 살아갈 방이 된단다. 그렇게 되면 더 크고 아름다운 집이나 방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겠지?” ---「방」중에서
“제가 이 산에 살 자격이 없었나 봅니다. 공연히 도시 물에 절은 주제에 산 사람이 된다고 해봤는데, 산도 제대로 모르고, 사람도 모르는 주제에 산과 더불어 산다고 했으니……” ---「방문객」중에서
“유리 벽, 내가 유리 벽에 갇혀 있구나. 아니, 내 모습이 유리로 되어 있다. 이제는 모두 환하게 드러난다. 정신이나 생각이나, 숨결까지도 확실한 형체로 드러난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습이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편안하다. 오랜만에 나를 보게 되는구나.”
---「유리 벽」 중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현길언의 소설들은 하나는 기독교에, 다른 하나는 죽음에 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기독교는 앞서 아름다운 덕성으로 본 사랑과 감사의 일상적인 삶의 지혜로 내면화된 기독교이거니와 많은 인물들이 일반 대학을 다니다 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도 하고 혹은 그의 어머니나 가족, 친구들 등 한국 소설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의 인물들이 소설의 전면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 목사들이 소설 속에서 행하는 것은 목회를 내세우기보다 목사여서 만나게 된 친구들의 내면적 고통이나 ?짧은 혀 긴 혀?에서처럼 진실을 밝히는 사회 운동가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평신도들이 보이는 기독교는 보수적이거나 기복적 혹은 열광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 삶의 지침으로서, 감사와 겸손을 몸으로 보이는 검소한 기독교이다. [……] 자연의 절대적인 운명으로서의 죽음, 그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가장 치열한 정신을 보여주는 기독교, 그 사이에 끼어든 세속의 사람들에게 거의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배반, 그리고 나는 이 세 자장에 ‘유리 벽’처럼 가려진 ‘외로움’의 밑그림을 바라본다. 그 외로움이 있어 교회가 있고, 사람들의 끊임없는 잇고 갈리고 어울리는 맺음으로부터 벗겨지는 고독에 버티며, 이렇게 돋워진 외로움이 끝내 밀어대고 빚어내어,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인가.
김병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