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순례의 여정, 곧 파스카 영성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백정 출신이었던 황일광 시몬 복자는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우리 순교자들은 신앙으로 인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맛보았고, 그것을 천상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 나갔다. 아무리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신분이 낮아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맛, 복음의 절대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분들이 지닌 순교 영성의 뿌리다.
---「8~9쪽, 머리말」중에서
채제공과 정조가 생을 마감하자 조선은 곧 노론 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인 시파와 천주교인에게 핏빛 역사가 시작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1801년(순조 원년) 정월 10일 사학을 금하는 교서를 발표한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는 첫째, 당파 싸움에서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고 둘째, 아는 것이 오직 주자학인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이나 사상은 변괴, 곧 불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51쪽, 한국의 순교자들」중에서
그는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참수되기 전 김대건 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76-77쪽, 한국의 순교자들」중에서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은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고, 그 여정을 순교로 마쳤다. 이렇게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무사히 건너가는 파스카 여정, 곧 부활의 신앙을 살아갔다. 이러한 까닭에 ‘순교의 터전’이었던 교우촌은 박해 시대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교회 재건의 활로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본당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이 교우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99~100쪽, 교우촌」중에서
부모들은 움막 안에서 굶주림에 우는 어린아이들을 기도로 달랬으며, 자녀들은 집안의 신앙을 먹고 자라면서 자신의 신심을 키워 나갔다. 교리 서적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시대라 부모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기도문과 교리 내용,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 천주가사天主歌辭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 주었다. 신앙의 대물림, 신앙의 전수를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극기하는 삶의 모범을 보였고, 가르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함께하는 신앙을 실천하였다.
---「105쪽, 나자렛 성가정 영성과 순교 영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