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 건너온 봄
햇살이 눈꺼풀 무거운 한낮을
뻐꾸기 하염없이 울고 있네
고내오름* 중턱, 나무 그늘에
한 줌 바람 이마에 시원하고
삼백 년 소나무, 네 나이 몇이냐 물으니
줄곧 걸어온 길이 저만치 사소하다
적막하다, 봄 한낮 산속의 고요
숲은 침묵으로 더욱 깊어지고
먼 뻐꾸기 소리, 개개비 둥지에 놓고 온
제 새끼만 염치없이 부르고
그립다
고향 육십 년
늙은 마누라 옆에 두고
웬 그리움이 저미어오는가
뻐꾹 뻐꾹 뻐꾹
고향에 살면서 고향이 그립다
* 고내오름: 표고 175m의 산. 제주 고내리 소재이나 애월리와 연접하고 있다.
---「뻐꾸기 울고 있다」중에서
그리움에도 무게가 있다면
내 그리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한 세월 모르게 짓무른
가슴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어차피 혼자서 가는 길
길가에 가로등처럼
구름 뒤에 낮달처럼
오는 날은 오게 두겠네
가는 날은 가게 두겠네
훗날 어쩌다 눈이 마주쳐
내 사랑 어디 있나
그대 물으면
살면서 그리웠노라고,
살다가 잊었노라고
그리움에도 무게 있다면
그리움을 달 저울이 있을까
---「그리움에도 무게가 있다면」중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몇 년을
전쟁의 상흔이 벌건
서울거리를 기웃거리고 다닐 때
골목 어귀에 군고구마 냄새가
나를 막아서는 거다
그리울 것 없다던 고향이, 글쎄
한사코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자꾸 배에서 꼬르륵거려서
꼬깃꼬깃 천환 한 장을 던져주고
얼른 군고구마 한 봉지를 들고
골목 어귀에 기대어 호호 불며 먹을 때
하얀 입김이 우리집 저녁연기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보리밥 냄새로
쌓인 눈이 다 녹는 거였다
고향에도 함박눈이 푹푹 내리겠지
산이며 들이며 하얗게 쌓였겠지
이 저녁 한라산 노루들이 푹푹 빠지면서
마을로 내려오겠지
---「서울무정 3」중에서
소싯적 서울 4년에
안 해본 짓이 없다
종로 1가에 있는 서린당구장
붉은 벽돌집 적산창고에서
청소를 하며 지낼 때
지붕 밑 다락방이 나의 숙소
사다리 타고 올라가 쥐랑 자다가
아침에 내려와서는 사다리를 치웠다
내기당구 손님들로 통금이 넘어서야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청소를 할 때, 꼭 그때
남영동 멀지 않은 서울역에서 기차가 울었다
화통 삶아 먹은 철마가 왝-왝- 소리를 지를 때
당구대 위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려서 그런가,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떨어지는 눈물이 서러워서
목 놓아 울곤 하였다
---「서울무정 4」중에서
바람 부는 날
방파제에서 노을에 젖을 때
어린 그리움이 불쑥
저 수평선을 부른다
어이- 어이-
바람 부는 날
발길 따라 고내봉에 오르면
그리움에 체한 가슴
저 한라산을 부른다
어이- 어이-
잊었노라,
그렇게 사십 년 세월
바람 부는 날이면
해묵은 사랑이 불어와
저 바다에 파도가 높다
어이- 어이-
---「그리움」중에서
가며오며
우체국 안을 기웃거린다
혹 내게 부쳐올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애월우체국 뜰에
백 년 늙은 선인장은
해마다 삼백일까, 오백일까
촛불 켜듯 꽃을 피운다는데
가는 사연, 오는 소식마다
노란 꽃 송이송이
그리움이 피어난다 하던가
가며오며
우체국 안을 기웃거린다
혹 내게 부쳐올
섧은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애월우체국 1」중에서
가며오며
일없이 우체국에 들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그냥 웃고
아가씨, 눈웃음으로
쟁반에 받쳐온 믹서커피를
나는 목례로 받아 홀짝거린다
밀감을 보내는 사람
감자를 보내는 사람
건어물을 보내는 사람
보내는 마음은 섭섭하다는데
보내는 사람마다 족한 얼굴이다
시골우체국에는 부쳐오는 것은 없고
암탉처럼 늙은 마음들을 보내고 있다
오가며 일없이 우체국에 들르고
아가씨의 고운 마음씨를 대접받고
홀짝홀짝 오가는 인정을 마시고 온다
---「애월우체국 2」중에서
잘못 그은 선이 있다
지우고 싶은 삶이 있다
다시 긋고 싶은 선이 있다
새로 그리고 싶은 삶이 있다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고
고쳐 그릴 수 없는 인생은 슬프다
아, 나는 습작 없이
명작으로 가는 길을 모르네
안개 짙은 바다에
부우- 부우- 무적은 울고
보아라, 어느 날
싹둑 잘린 나이테 하나 들고
그 앞에 홀로 서리라
한 번이어서 소중하고
수정할 수 없어 애틋하고
서툴고 흠 있어 내 것인 것을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데생dessin」중에서
초추의 백사장은 텅 빈
이야기로 쓸쓸하고
한여름 불타던 열정은
쓸쓸히 휴지만 날리고 있네
바람은 깔깔하고
파도도 범하지 못하는
저 아득한 공허,
여명도 망설이는 하얀 적멸을
첫 순정의 촉감으로 걸었네
돌아보면 너무 멀리 와버린
나는 한 마리 물새 발자국
수없이 밟고 간, 아스라이
부서진 조개껍질들
억겁의 모래톱에 쌓이는 파도는
차마 떨리는 인과를 지우고 있는가
---「초추의 백사장」중에서
아내가 둘째를 낳은 후 이런 말을 하였다 산고가 시작되고
동네 산파에게 목숨을 맡기고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적이 처연하더라는 것이다
나면서 진 빚을 일생 지고 산다
너무 쉽게 가정이 와해되는 세상,
내 빚은 더욱 무겁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립다
까막눈 안 만들겠다고 옆집도 뒷집도 안 보내는 중학교를
순전히 깡다구로 보내놓고 소처럼 일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고졸인 내가 중등교사전형에 붙었다는 통보를 받고
초등학교 운동장 100m 코스를 단숨에 달렸다
소나무 아래 앉아 헐떡이는데 눈물이 줄줄 내렸다
‘어머니, 막내아들 첫 월급으로 따뜻한 내의 한 벌 입으시고, 김이 펑펑 오르는 하얀 쌀밥 고봉으로 한 상 잘 잡숫고 가시지 그랬어요’
---「빚진 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