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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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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280g | 127*188*13mm
ISBN13 9791189129699
ISBN10 118912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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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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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봉투를 사던 날

이제 약을 줄여보자던 의사의 말을 듣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병원 밖 하늘은 흐린 회색빛이었다.
바람이 불면 제법 선선했지만, 눅눅하고 더운 오후였다. 빵빵거리는 소리 뒤로 구급차가 다급하게 지나가고 문득, 걷고 싶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조금 걱정됐지만, 바람도 느끼고 지나가는 것들도 보면서 걷고 싶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우중충한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날은 썩 마음에 들었다. 해묵은 감정들로 얼룩덜룩한 나와 어울리기도 했고, 하늘이 굳이 파랄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즉흥적으로 마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쓰레기봉투를 샀다. 바람이 불어도 눅눅한 날씨 탓에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개운했다. 그냥 다 좋았다. 현관문을 여니 시원하고 달달한 공기가 나를 와락 안아 주었다.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안아 주는 것 같아 신발도 못 벗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소리까지 내며 목이 마를 때까지 한참 울었다. 창문도 열고 커튼도 열고 습한 공기라도 마음껏 마시고 나서야 편안한 내 집에 들어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이불에 눕고 싶어 잠시 고민했다.
집에 오면 병적으로 순서까지 지켜가며 반드시 완료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들이 있었다. 삼중 잠금장치까지 여러 번 확인하고 보일러실, 옷 방, 베란다를 순서대로 둘러보고 고데기는 여전히 안전하게 전원이 꺼져있는지 두 번 점검하고 나서 마음이 놓이면 그제야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다. 불안한 마음이 커지면서 점차 길어진 루틴이었다. 이것을 깨고 싶은 충동이 든 것이다. 처음으로. 그래서 손만 씻고 곧장 이불로 향했다. 오늘 많은 것을 깨버릴 생각으로.

생각해 보면 이불은 항상 편안했다. 억지로 괜찮지 않아도 됐고,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도, 억지 부리지도 않았다. 벌떡 일어나 이불부터 봉투에 담았다. 어쩌면 긴 겨울을 지나오는 동안 한결같이 포근하게 나를 안아준 유일한 감정이 이 이불에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누워도 이불 안은 늘 아늑하고 따스했기에 항상 고마웠지만, 그래서 이제는 버려야 한다. 숨 쉴 때마다 무기력하게 가라앉던 내 마음의 은신처를 없애버려야 정말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도 지우기로 했다. 도저히 버릴 수 없어 이사하면서도 고집부리고 모셔왔던 전공서적, 수험서, 두세 번씩 확인하며 점검하던 업무 자료들을 현관에 쌓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력한 시간이 아깝고 소중해서 어떻게든 버티려 안간힘 쓰다가, 다시 시작할 에너지까지 전부 소진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실수하지 않으려 깨알같이 적어둔 메모들이 꽤 많이 나와 멈칫했지만, 더는 나의 노력을 불쌍하고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최대한 잘게 찢었다. 쓸모없는 짓을 한 게 아니라, 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걸어온 것뿐이다. 그리고 그 노력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그 흔적들은 버리는 것뿐이다.
의외로 굉장히 후련했다. 지나간 시간이 떠올라 눈물이 나긴 했지만, 복잡한 심경들이 얽혀있었다. 열심히 살아온 나를 안아 주고 싶었고, 그때는 나를 챙기지 못하고 비겁하게 외면해버렸던 것이 슬프기도 하고,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안아주고 싶었다.

밤공기는 꽤 선선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뒤처지긴 했어도 겨울에 갇혀 있던 나의 시간이 드디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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