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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조의 칼

덴조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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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450g | 153*224*30mm
ISBN13 9788998937102
ISBN10 899893710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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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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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마음속에 숨어 있던 증오에서 모호함을 벗겨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증오가 향할 구체적인 대상이 생기기만 한다면 진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지요. 이들이 원했던 것은 숨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둠으로 자리 잡은 증오, 그에 대한 살 입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p. 13

“그 안에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동그란 백석白石 한 조각이 있었습니다. 돌이라기에는 너무 가볍고, 속에서는 희미하게 잎사귀 무늬 같은 게 비쳐 나왔는데요. 희한하게도 그 빛깔들이 검은색에서부터 금빛까지 모두 달랐습니다. 뭐냐고 물어보니 대마도의 어느 절에서 신물神物로 보관하던 물건이라더군요. 사고로 절이 불탄 후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정확히 그게 뭔지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그대에게는 이 물건이 보배이며 나는 탐욕을 부리지 않음을 보배로 삼으니, 이 보배를 그대에게 돌려줌으로써 내 보배를 지키면 우리 둘 다 보배를 온전히 가질 수 있다.’고 하며 돌려주려고 해도 완강히 사양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말을 멈추고 뭔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p.91

내 왼손이 번개처럼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사내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놓았다. 나는 사내손목을 그대로 잡은 채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풀어갔다. 몇 겹으로 감긴 종잇장이 풀리자 이윽고 그 속에서 길쭉한 나무토막 하나가 드러났다.
‘......?’
허옇게 빛이 바랜 백목白木은 그 형태와 무게만으로 내게 뭔가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사내의 손목을 놓고 양손으로 나무토막 끝을 잡아당겼다.
“쓰으윽...”
뱀이 모래밭을 기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이어서 내 눈 앞에서 새파란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한 뼘 반 가량의 칼날이었다. --- p.126

바위가 가려 준 장맛비 유월의 삿갓이여/ 산을 덮은 눈 사이로 피어나네 구름봉우리/ 절 마당을 쓸고 떠나는데 다시 흩날리는 단풍잎/ 고개 너머 가는 봄에 눈물 없이 우는 새

그렇게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이번에는 그 구절들을 봄부터 겨울까지의 계절 순서에 맞춰 다시 배열해 보았다.
고개 너머 가는 봄에 눈물 없이 우는 새/ 바위가 가려 준 장맛비 유월의 삿갓이여/ 절 마당을 쓸고 떠나는데 다시 흩날리는 단풍잎/ 산을 덮은 눈 사이로 피어나네 구름봉우리 --- p.145

“덴조,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모두 다했다. 이유 없는 모욕도 견딜 만큼 견뎠다. 그러나 세상은, 이 더러운 세상은 더 이상 우리 집안을 무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이제 난 마지막 꿈을 베어 버리려고 한다. 더 이상 네게 이 칼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너도 이제 너만의 길을 가야한다. 살아남기 위해 사는 길.”
때 아닌 폭우가 퍼붓던 늦여름 오후였다. 엉망으로 취해 돌아온 아버지는 울부짖으며 칼을 뽑더니 있는 힘을 다해 담장 옆 바위 위로 팽개쳤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쏟아지던 빗줄기를 가르며 허공으로 튀던 불꽃들과 그보다 더 퍼렇게 이글거리던 아버지의 눈을. --- p.230

“바보 같은 놈,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
최천종이 낮게 소리쳤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놓으십시오! 백석을 주지 않으시려면 저를 막지도 마십시오!”
“네 목숨은 내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한창 젊은 나이에 그렇게 쉽게 자결하려는 이유가 뭐냐? 그걸 모두 얻으면 정말 너를 옥죄이던 현실이 바뀔 것 같으냐? 최소한의 운명이나 현실은 받아들여. 아무 것도 수락하지 않으면서 바꿀 수 있는 건 결코 이 세상에는 없어!”
“그렇게 말씀하시는 나리는 무엇을 긍정하고 수락하셨습니까? 이제 돌아가시게 되면 조선 땅에서 나리를 기다리는 현실은 뭡니까? 그리고 나리가 그 속에서 가능하거나 꿈꿀 수 있는 일은 또 뭡니까? 꿈꾸지 않으면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 울부짖음을 듣던 순간 최천종이 멈칫했다.
“꿈꾸지 않으면서 바꿀 수 있는 세상이란 없다…” --- p.320

비명과 고함소리가 커져가며 불빛들이 급하게 흔들렸다. 돛을 사르며 타오르던 불빛이 기울어진 선미를 비추었다. 그러자 내 눈에는 그곳에 혼자 서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은색 겉옷에 하얀 얼굴, 흐트러진 머리, 두 손에 채워진 수갑.

‘저건, 분명히 덴조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초병들조차 옥문만 열어주고는 몸을 피해버린 듯했다. 덴조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제야 덴조의 글에 쓰여 있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그의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짚은 채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예를 올리던 그때, 나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어둠을 밀어내는 어떤 환한 빛을 본 것 같았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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