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수록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가 때로는 무책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고,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 되기도 한 언론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언론인이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직업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책은 언론인이 직업 정체성을 고민해 온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언론의 위기 속에 언론인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성찰을 통해 바람직한 직업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화기의 언론인은 개신유학자들이거나 신학문을 수학한 인물들로서 관료와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관료로 활동하다 언론인이 되었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관료로 진출하기도 했다. 개화기의 언론인은 반봉건과 반외세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며 계몽적이고 저항적인 언론인의 전통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직업적 전문성의 향상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개화기 언론인은 자신들의 활동을 간관(諫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인식했고,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제에 대해 비판적 활동을 강화하며 지사적 언론인상을 만들어 나갔다.
---「1장 개화기의 언론인」중에서
식민지 시기 언론인 중에 개화기 때부터 활동했던 인물들은 거의 없었다. 식민지 시기 언론인은 대부분 일본이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개화기 언론인의 지사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언론활동을 하고자 했다. 식민지 시기 언론인은 일제의 강력한 언론탄압과 불안정한 재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개화기에 비해서는 비교적 체계적인 취재보도체제가 갖추어졌고, 점차 직업적 전문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 언론인은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언론활동을 지향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노동자화’ 되었다는 자조적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 후기로 가면서 지사적 언론인다운 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반면에 임금이 상승되고 직업적 안정성은 높아졌다. 지사주의가 쇠퇴하면서 전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친일 활동에 나서는 인물들도 등장했다.
---「2장 식민지 시기의 언론인」중에서
광복 직후 언론사가 급증하면서 언론인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광복 직후 언론인이 된 인물들의 교육수준은 전시대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자질이 떨어지고 윤리수준도 하락했다. 광복 직후 한동안 이념적 대립 속에 정치적 목적의식을 앞세운 언론활동을 했고, 1950년대에는 여?야당지가 대립해 정파적 언론활동을 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의 언론통제는 강력한 편이었지만 그리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1950년대 내내 언론인의 임금은 대단히 낮은 편이었고, 고용 불안도 아주 심각했다. 이런 현실에서 오히려 언론인의 지사주의의 계승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사주의에 대한 강조는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언론활동을 위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인의 경제적 빈곤을 상쇄시켜 주는 의식으로서도 의미를 지녔다. 한편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윤리의식을 개탄하며, 언론인의 전문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3장 분단체제 형성기의 언론인」중에서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들어서서 언론인의 교육수준은 계속 높아져 1960년대에 중앙 언론사의 경우에는 기자들의 대부분이 주요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권위주의 정권 시기 기자들의 지역적 편중이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언론인의 평균 연령은 점차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권위주의 정권은 언론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가하는 한편 광범위한 특혜를 베풀기도 하는, 이른바 ‘채찍과 당근’을 정책을 실시했다.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한 언론통제는 언론인에게 무력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특혜를 통해 임금 수준이 향상되고 언론 산업의 성장으로 고용 불안이 사라지면서 언론인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이후 지사주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샐러리맨’이 되었다는 자조적 의식이 확산됐다. 1970년대의 노조결성 시도나 전문직화 모색은 자조와 자학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였으나 역량 부족과 내적? 외적 통제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87년 이전까지 언론인이 언론노동자로서의 자각이나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자부심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4장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언론인」중에서
민주화 시기에 들어서면서 언론인의 교육수준이 더욱 높아졌고 고령화 추세가 급격히 강화됐다. 언론인의 권력 지향성도 더 높아져, 과거에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언론인이 충원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 언론인이 먼저 권력에 다가서는 ‘폴리널리스트’(politics+journalist)의 시대가 되었다. 정권의 직접적인 언론통제는 사라졌지만, 다양한 방식의 간접통제가 지속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동안 임금수준이 높아지고 고용도 안정되었지만, 과당경쟁이 계속되고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1990년대 말 이후 임금수준이 하락되고 고용불안이 심화되었으며 노동강도가 높아졌다. 민주화 시기 이후 언론윤리의 향상이나 전문성의 강화가 많이 논의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조건 개선이나 공정보도 실현을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계에 봉착해 있다. 경영상 위기나 정파적 대립 속에 언론사의 자사이기주의가 심화되며 언론인의 ‘샐러리맨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5장 민주화 시기의 언론인」중에서
지사적 언론인의 전통에서 과도한 정치적 개입이나 낭만적 생활태도와 같은 부정적 유산을 걷어내고,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언론노동자로서의 철저한 자각과 전문직으로서의 언론인에 대한 인식을 통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율성이 없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현실에서 전문성을 향상시키거나 윤리의식을 제고하기 어렵고, 전문화나 윤리의식의 강화 없이는 직업적 위상을 제대로 확립하거나 공정보도를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언론인의 직업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언론의 위기 속에 언론인이 ‘탈샐러리맨화’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종장 한국 언론인의 역사적 특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