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보이지 않은 역사

보이지 않은 역사

: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저항과 연대

주윤정 | 들녘 | 2020년 10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66
정가
15,000
판매가
13,500 (10% 할인)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유료 (도서 15,000원 이상 무료) ?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428g | 148*210*15mm
ISBN13 9791159255830
ISBN10 115925583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점복업자 집단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직업 집단을 근대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노력과 별개로 그들은 지속적으로 근대의 타자로 호명된다. 기독교 계열의 선교사와 총독부 모두 점복 맹인을 타자화하고 미신으로 호명하며 탄압하는 데 가세했기 때문이다. (……) 대구 지역에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려서 시력을 잃고 맹인 판수에게 가서 점복업을 배워 점쟁이가 된 맹인 황씨가 있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내용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개종 사례를 모아놓은 책에 기록되어 있다. 황씨는 점쟁이로 일하며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법이나 여행을 잘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새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해야 귀신을 쫓을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일종의 사기라 지적하면서 황씨가 기독교인이 된 후 이 모든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한다. 황씨는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문자를 만들기도 하다가,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맹인에게 글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듣고 대구에서 평양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점자 읽는 법을 배운 후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 도덕적인 방식으로 판수의 활동을 억제한 선교사와 달리, 조선총독부의 경우에는 경찰력을 동원해 판수를 취체(取締)했다. 총독부의 정책은 시기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1910년대에는 강력하게 미신 타파 정책을 실행했다. 위생 관련 취체에서는 비과학적인 치병(治病)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판수의 점복업과 독경 등을 금지했다. 이런 정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실행되었는데, 경무청에서는 1897년 5월 무당?판수의 미신 행위를 본격적으로 금지하고 이런 행위가 발각될 때에는 중죄에 처한다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또한 판수가 혹세무민하며 민간에서 재물을 빼앗는 폐단 등이 정부의 문명개화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논의도 전개되었다. 비단 식민 권력만이 아니라 소위 ‘문명개화’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판수는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 「문명의 타자」 중에서

평양의 맹학교와 총독부의 제생원의 자선과 자혜의 경합은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된 배경이다. 조선의 개항 이래 선교사들은 조선에 와서 사회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이는 선교 방법으로 직접 선교보다는 교육과 의료, 사회사업을 통한 네비우스 선교 방식(Nevius Mission Plan)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한편 선교사들이 주로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조선의 지배층이라기보다는 여성이나 빈민 등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사회적 약자들로 기독교의 복음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선교사들의 여성과 빈민, 장애인에 대한 교육 및 관심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선교사 사회사업이 시작되던 초기부터 이들은 서구의 선진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낙후된 조선에 근대적이고 문명적인 사업을 개진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윌슨(Robert M. Wilson) 선교사의 한센병 관련 사업(정근식, 1997)과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맹인 교육 사업을 들 수 있다. 맹인 관련 특수교육을 처음 시작한 로제타 홀은 교육 목적에 대해서도 “여성 맹인들을 점복, 무당 등 미신적인 삶에 종사하지 않게 하고, 그리스도교 가족의 유용한 일원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로제타 홀은 기독교 교인인 오씨의 딸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기회가 비로소 왔구나. 그 애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니 내 의도를 곡해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선교사들의 의료 시술이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들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에 대한 조선인들의 두려움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로제타 홀은 맹인에게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독교 교인의 딸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자선과 자혜」 중에서

맹인 점복인들은 조선시대 이래 ‘맹청(盲廳)’이라는 조직을 운영해왔는데, 이 조직에서 경제적 활동을 조직하는 것을 ‘문생청’이라고 했다. 문생청에는 양천을 구별하여 좌방과 우방을 두었고, 각 좌우방에는 5개의 문생청이 있었다. 그들은 문생청 조직을 통해 맹인 점복업자들의 경제 활동과 교육 활동을 조직했다. 대한제국을 거쳐 식민 시기에는 이 문생청이 유명무실해졌지만 일부 맹인 점복업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힘겹게나마 ‘부활’했다. 특히 1924년에는 맹인 수십 명이 회합하여 ‘조선맹인조합총본부’를 조직하고 규약 등을 협의한 후 당국에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회의 목적이 ‘불쌍한 앞 못 보는 이들이 서로 안마하는 법을 배우며 점자법, 역리 연구 등을 통하여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며 또 자기네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맹청의 기본 강령은 ‘5훈과 5계’라는 조합의 규약으로 명확해졌다. 문생청은 문생계라고도 불렸는데 기능적인 측면에서 계와 유사했다. 당시 조합을 설립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맹인들이 벌이하는 대로 얼마씩을 지정해서 꼭 그거를 내는데, 맹인들이야 거짓말 하는 법이 절대로 없으니까, 많이 벌면 많이 내고. 아주 한 푼도 못 벌면 한 푼도 안 내고. 벌어지는 대로” 기금을 내는 상호부조의 원리에 있었다. 즉 조합은 이 원칙을 보다 체계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맹인 조합과 맹인 직업의 변화」 중에서

제생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박두성은 조선인을 위한 적절한 문자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서 한글점자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박두성은 강화도 교동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08년부터 어의동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13년부터 제생원 맹아부에서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는 맹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직한 것 이 아니라 총독부에서 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제시해 이직한 것이었다. 당시 제생원 맹아부에는 4명의 일본인 교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맹인 교육이 시작된 후 학생을 모집하려 했지만, 제생원이 맹인을 죽여 버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풍문이 돌아 학생들이 잘 모집되지 않았다. 박두성은 전국을 돌며 맹인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해, 맹인들이 제생원에 찾아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했다. 그는 제생원 훈도로 재직하면서 점자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1917년에는 『반도시론 (半島時論)』에 「반도맹아의 교육」이란 글을 기고하면서 일본점자의 방식을 설명했다. 박두성이 조선 내에서 통용되던 점자 방식에 대해 깊이 연구를 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그는 특히 당시 평양에서 사용되던 로제타 홀의 점자에 대해 언급하며 제생원에서는 일본점자를 기본으로 하는 6점 점자를 쓴다고 적었다. 추후 박두성은 로제타 홀에게 프랑스 브라유(Braille)식의 6점형 점자로 한글점자를 고치자고 제의했으나, 홀 부인이 뉴욕 포인트식 점자로 일본점자 안까지 만들어 보내며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바람에 박두성은 독자적으로 브라유식 한글점자를 개발했다. 점자를 개발하게 된 원인은 박두성이 교육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교육을 강조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듯, 글을 읽는 것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매우 강조했다.
--- 「박두성의 교육활동과 훈맹정음(訓盲正音)」 중에서

시각장애인의 시위는 1966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은 동맹 휴학, 국회의사당에서의 데모를 통해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권 문제를 사회에 널리 알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유사 의료업자 법안 심의 과정에서 안마업권이 시각장애인의 직업 보도이며 생존권이라는 인식이 점차 높아졌다. 처음에는 법의 체계성, 보편적·근대적 입법을 강조하던 의원들도 시각장애인의 안마업권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는 시각장애인들의 집단행동과 이를 청원과 정치적 로비로 연결시킨 전략이 성공한 덕분일 것이다. 이후 1973년 유신 체제 아래서 이를 시행령으로까지 만들어냈던 과정에 대해 시각장애인들은 “그 당시는 유신 체제였거든? 유신 체제에서는 국회가 아니고 국무회의에서 법 다루면 끝이야.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하고 공포하면 그만이거든. 그러니까 안마사 조항이 들어가는 법이 바로 일사천리로 제정된 거야.”라고 말했다.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대통령에게 시각장애인의 시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존의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치권 등 고위층 인사들이 안마를 즐겨 받았고, 이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은 정관계 인사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양만석은 안마업권에 대한 시각장애인의 독점적 권한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안마 고객을 통해 대통령에게 청원했다고 말했다.
--- 「시각장애인의 권리주장」 중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우 서양의 선교사들은 점자와 수예, 타이핑 등 다양한 직업 교육과 문해 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시각장애인의 근대적인 직업 영역은 안마로 일원화되었다. 전통적으로는 시각장애인들이 판수라 불리며 점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식민지기를 거치며 점차 안마업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안마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영역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안마업은 독자적으로 존속되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 서구식 의료 체계의 도입으로 인해 삼료업은 한국에서는 폐지되었다. 이후 여러 시각장애인의 투쟁을 통해 안마업이 시각장애인의 독점적 직업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갈등적 요소가 잠재해 있고, 시각장애인의 안마업의 독점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위헌 소송이 여러 차례 진행 중이다. 대만에서는 일제 식민 통치 이후 안마업이 맹인의 직업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안마업이 시각장애인의 독점적 직업으로 1979년 이후 인정되었지만, 2000년대 이후 시장 자유화와 더불어 이 독점이 폐지되었다. 대만에서는 시각장애인의 조직이 상대적으로 강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권리 의식이 다소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장의 영향을 받아 독점권이 비교적 용이하게 폐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안마업이 시각장애인들의 특수한 직업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전통 사회 이래 일본 사회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악사, 승려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일종의 직역 집단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 시기 전통 사회의 직능 단체들이 폐지되면서 시각장애인 악사의 조합이었던 당도좌가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집단성을 유지하고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새로이 근대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맹학교에 직업 영역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이후 침, 구, 안마 즉 삼료업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 「식민/탈식민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의 직업 변화」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2,5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3,5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