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면서도 흥겨웠던 첫 번째 일본 여행 이후, 나는 뻔질나게 해외여행을 다녔다. 여권도 몇 번이나 바꾸었다. 그래도 뒤늦은 ‘베를린의 횡재’가 찾아올 때까지는 한 번도 아시아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쳇바퀴 돌듯 늘 아시아의 대지를 떠돌고 있었다.
한번은 두만강 강변을 따라 옛 소련제 자동차를 세내어 타고 가는데 내 옆구리 쪽 문짝이 덜컹 떨어져나갔다. 기겁한 내가 뭐라 말도 잇지 못하는데, 운전기사는 항다반사처럼 태연히 내려 문짝을 도로 달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외려 고마웠다. 거기 옌지에서는 쑤이펀허에서 중러 국경을 넘어 우리가 한때 ‘원동’이라 불렀던 시베리아 땅으로 뭔가를 팔러 간다는 조선족 사내들과 아침부터 배갈도 나눠 마셨다. 울란바토르행 국제 열차를 타고 가던 어느 새벽 문득 눈을 떴을 때에는 얼어붙은 황막荒漠 위를 이리 떼처럼 사납게 날뛰던 눈 폭풍도 목격했다. 티베트의 고원에서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뒤바뀌는 날씨에 넋을 잃었다.
--- p.11
나는 다시 아시아의 우기를 걷는다. 매일같이 한 시간씩 폭우가 쏟아지던 도시들. 바나나 잎에 듣던 빗줄기, 그리고 그 상쾌한 빗소리. 나는 루앙프라방의 어느 카페에서 새삼 식민주의자 행세를 하며 단돈 1달러에 맛 좋은 원두커피를 마셨고, 수 세기를 폐허로 버텨온 앙코르의 어느 사원에서는 밀림의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진 반딧불이들의 황홀한 군무에 까무룩 넋을 잃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인도의 북쪽 끝 다람살라에 도착한 건 아직 캄캄한 꼭두새벽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수염이 무성한 사내들이 내 팔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서로 잡아끌었다. 나는 화도 내지 못하고 그중 억센 한 사내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알고 봤더니 그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더 없이 착한 무슬림이었다.
--- p.15
1993년의 첫 번째 일본 여행에서 ‘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회’라는 모임을 만났다. 대부분은 나고야 일대에 사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모임이 처음 발족한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월 1회 정도로 독서회를 열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1980년부터는 연 1회 『가교』라는 동인지를 펴내기 시작했다. 그 후 “문학을 통해 재일동포의 생활과 사상을 접하고, 스스로의 차별 의식과 제도의 차별을 극복하는 관점에서 민중 연대의 기저를 찾겠습니다”고 한 기치를 4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모임은 2020년 4월로 무려 466회째를 기록했다. 그동안 이들은 김석범·김시종·이회성·양석일·유미리 등 저명 작가 외에도 여러 신진 작가들까지 눈여겨보며 쉬지 않고 작품을 읽어왔다. 나는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그처럼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 p.18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아시아 작가들의 소설 작품 총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분량상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은 제외했고, 타이완과 홍콩과 티베트와 오키나와를 따로 분류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가 아닌 이상, ‘국경’을 정하고 ‘국적’을 부여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비매품에, 아마추어 역자들이 학교 교지에 번역한 단편들까지 다 따져도 1,300여 편이었다. 그중 중복 출판이 한 100편은 될 것이고, 이중국적이나 디아스포라 등 국적이 애매한 경우도 꽤 많았다. 또 타고르처럼 한 사람이 150편 넘게 소개된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빼면 어떻게 될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 하나하나를 다 꼽아도 1,000편이 되지 않는 건 분명했다. 세상에, 근대 100년간 최소 마흔다섯 개 이상의 ‘나라’를 대상으로 이 땅에서 출판한 모든 작품의 양 치고는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단 한 편의 단편조차 번역되지 않은 나라도 수두룩했다. 상황이 이러매,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워낙 번역에 공을 들인 일본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게 우리의 아시아였다.
--- p.21
아시아의 근대는 대개 식민의 역사로 문을 연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외국 세력이 처음 침략의 발길을 내디딘 곳은 중부의 다낭이었다. 1887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이 된다. 같은 보호령이라도 북부 ‘통킹’과 달리, 중부는 ‘안남’이라는 이름으로 명목상 베트남 황제의 자치가 허용되었다. 반면 ‘코친차이나’라고 불린 남부는 말 그대로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고, 외세의 개입 역시 가장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트남 문학을 접하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은 대개의 소설가들이 하노이를 포함해 북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만 따져도 레민퀘, 바오닌, 호안타이, 도안레, 마반캉, 판티방안, 응우옌후이티엡, 호앙밍뜨엉, 이반 등이 모두 북부 출신이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렇다는 말이고 당연히 내 견문이 좁은 탓이겠지만, 실제 응우옌옥뜨를 빼면 남부 출신 작가로서 얼른 떠오르는 이름은 없다.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작가 반레는 바오닌과 마찬가지로 열일곱의 나이로 전쟁에 뛰어들어 마지막 통일의 순간까지 전선을 누볐다.
--- p.34
어딘가 낯설었다. 뭐지, 싶었다. 시계탑 아래 우뚝 선 동상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호찌민이 일어섰다! 그가 어린아이를 안고 인자한 눈길을 보내던 좌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자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양이나 경북 구미 시의 황금 동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박한 크기였지만, 그래도 그건 이미 내가 알던 사이공이 아니었다. 동상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호찌민의 이름을 딴 도시는 아시아의 그 어떤 도시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던 최고의 매력 중 하나를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었다. 20년 전 내가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랑스럽게 “박 호(호 아저씨)”를 말했다. 그때 도시는 무척 가난했지만, 좌상을 가리키며 설명을 보태던 베트남 사람들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껌팔이 소년도, 그림엽서를 파는 아주머니도, 시클로 운전수도, 외국인의 난데없는 질문에 얼굴이 빨개지던 여대생도. 나 역시 가슴에 기꺼이 외경심을 담고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고 또 찍혔다. 그런데 이제 호찌민은 더 이상 ‘호 아저씨’가 아니었다. 아이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갑자기 소환되었다. 서방의 연출자라면 그걸 ‘죽은 왕의 귀환’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순간, 그는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헌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서도 당당하게 사회주의 형제국의 지도자들을 만나던 그가 아니었고, 허름한 카키색 옷을 입고서도 입가에 늘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고,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도 평생 우거를 떠나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다.
이제껏 스무 번도 넘게 베트남을 들락거렸지만, 나는 그날 비로소 ‘내 베트남’에도 어딘가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p.58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근대를 맞이한 것은 과거와 가장 명징한 단절을 선택한 도쿄였다. 가장 명징한 단절을 선택했기에 가장 먼저 근대를 맞이했는지도 몰랐다. 그때까지 존재조차 희미했던 천황이 ‘얼굴’을 지닌 현인신現人神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자, 과거는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사무라이는 칼을 놓았고, 중들은 절에서 쫓겨났다. 도쿄는 스스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은? 베이징과 서울과 하노이는 완강히 빗장을 걸어 잠갔다. 칼과 창 몇 자루와 자존심으로 군함과 대포를 상대하려 했다. 분투했고, 장렬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처참한 능욕이었다. 강제로 당한 탈아입구.
--- p.110
춘원 이광수가 상하이에 나타났다. 그것이 1913년 연말, 그가 아직 고주孤舟라는 호를 쓸 때였다. 그는 일엽편주, 말 그대로 외로운 배 같은 신세였다. 정주 오산학교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었고, 그저 착하기만 한 아내와는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압록강 강변에서 그가 올라탔던 배가 어느덧 황푸강 강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실 그는 국제도시 상하이에 어울리는 인상과 차림이 전혀 아니었다. 값싼 청복에서 번진 푸른 물 때문에 모가지며 손이며 온통 퍼렇게 물이 들었는데, 그나마 배를 탄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해 퀴퀴한 제 몸 냄새에 제가 먼저 코를 돌릴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는 궁상스러운 보퉁이를 들고 황푸 부두에 내렸다. 그런 다음 곧 안개 속에 잠긴 상하이의 시가, 강에 뜬 각국 병선과 상선, 뚜벅뚜벅 다니는 양인들과 헬레헬레 떠들기만 하는 청인들, 그 속으로 들어갔다. …이광수가 찾아간 그 집은 장차 『임꺽정』을 쓰고 신간회를 주도할 벽초 홍명희가 다른 조선인 망명자들과 함께 살던 셋집이었다. 이광수가 고주라는 호를 썼던 것처럼 홍명희도 그때는 가인可人이라는 호를 썼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 시절 어떤 이유로든 조선을 떠나온 그들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상하이가 아니라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도시 ‘상해’에서 살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