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학계의 관심은 주로 유교 개혁 논의에 맞추어져왔으며, 그 반대 측에 있던 대다수 보수 유림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구학 보수 유림들이 뚜렷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거나 무기력한 은둔자로 지냈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세상의 변화를 한탄하고 방관만 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일부나마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자료가 20세기 초 경북 영해에 살았던 남붕이 쓴 일기인 『해주일록』이다. 그는 근대를 살았지만 독학역행(篤學力行)하는 유학자의 삶을 살며 문집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해주일록』은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로, 17세가 되던 1886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 썼다.
--- p.14
남붕은 유교적 신념을 가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치성을 올렸고, 이를 마치고 나면 방으로 들어와서 선현의 잠명을 외웠다. 잠명을 외운 이후에는 새벽 공부를 하였고, 동이 트면 어머님께 문안을 올리고 사당에 배알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끝난 뒤 아침을 먹고 본격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해주 남붕 스스로는 독서하지 못한 날이 많았고 낮 공부도 폐하는 날이 많았다며 자신의 독서가 보잘 것 없다고 자평하기도 했는데, 낮에 손님이 찾아오거나 다른 일로 공부를 하지 못한 날이라도 새벽 공부는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상 그의 하루는 독서로 시작해서 독서로 끝났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 스스로도 8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50여 년 동안 독서에 매진했다고 자평하였다.
--- p.60~61
남붕은 평생 퇴계를 존모하였다. 남붕은 구학으로 전락되어가는 유학을 구원하고 유지할 계책으로 퇴계를 종교 선사로 삼고자 하였다. 남붕은 “세상의 도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우리 도를 유지할 계책은 도산의 사림과 연락하여 퇴도(退陶)를 종교의 선사로 삼는 것이다. 세상의 동지들과 단합하여 종교를 설립하고 후배 선비들을 장려해야 한다. 이것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퇴계를 본원으로 종교를 설립하여 그 종교를 중심으로 유림이 단합하고 후진 선비들을 장려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이러한 뜻의 「유교취지문」을 작성하여 도산서원과 주변 인물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남붕은 “사람의 도를 닦고자 한다면 마땅히 성현을 본받아야 하고, 성현을 본받기 위해서는 공자·안자·자사·맹자·정자·주자·회재·퇴계가 아니고서 그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역설하였다.
--- p.115~116
남붕은 아동 교육에 매우 진지한 태도로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동 교육은 그에게 일상사였지만 거의 매일 간략하게나마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그가 삶에서 의미 있는 일로 여겼다는 뜻이다. 비록 많은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가장 많았을 때가 여섯 명 정도) 아이를 맡아달라는 주위의 청을 거절한 적이 없다. 또 아이가 명민하지 못해 깨우치지 못할 때는 하루 종일 아이를 깨우쳐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이들을 강압적으로나 억지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의 아동 강학은 새벽 공부였기 때문에 결석을 하더라도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오게 하지 않았다. 새벽 공부에 빠진 아이들은 아침 식후에 다시 가르쳤다. 일기에는 아이들이 ‘병으로 오지 않았다’ ‘논다고 오지 않았다’ 등 가끔 그 사유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 p.186
유학자라 하더라도 집안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사에 힘을 써야 했다. 양반의 체모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이 손에 흙을 묻히며 농사를 짓는 일도 쉽지는 않았으므로, 나이 쉰이 훨씬 넘은 유학자가 농사일에 매진할 수는 없었다. 1925년 윤4월 중순 『춘추』 경문을 외우고 퇴계 시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을 하다가 일을 하기 위해 밭으로 나갔다. 이때에 그는 임금은 편안하고 신하는 수고로운 것이 양생(養生)의 요결인데, 선비가 몸을 수고롭게 하는 데에는 채마 밭을 가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에 책을 읽는 여가에 간혹 일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거꾸로 공부에 집중하느라 농사 때를 놓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 p.257
『해주일록』 속 남붕이 앓았던 질병은 학질, 설사, 종기, 안질, 감기, 촌충, 이명증, 치통, 신기 불편, 체기, 몸 기운 거북, 복통 등 다양했다. 이러한 질병은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위생풍습록(朝鮮衛生風習錄)』 중 「요병(療病)」 편에 소개된 눈병, 안구 종기, 치통, 식중독, 종기, 폐병, 학질, 황달병, 화류병, 나병, 뱀에 물렸을 때, 열병, 정신병, 부인병, 두창, 콜레라, 전염병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는 전염병뿐으로, 『해주일록』에는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 시기 전염병이 남붕이 사는 마을에 발생하지 않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붕은 본인이 앓았던 질병에 대해서는 초기 증세, 치료 과정, 치료 방법, 경과 및 결과 등에 대해 매우 세밀한 기록을 남겼다. 감기나 치통, 복통, 체기 등 가벼운 증상일 경우에는 대부분 별다른 조치 없이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이 빠른 시간 안에 낫지 않거나, 상태가 심해지거나, 입술 종기처럼 사람들에게 직접 보이는 질환의 경우에는 긴급하게 공의를 찾았다.
--- p.317~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