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우뚝 섰을 때 보이는 넓은 세상]『테오도루 24번지』의 작가 손서은 신작. 케냐 자원봉사를 떠난 평범한 가정의 ‘착한 아이’ 천수. 홀로 떠난 타국에서 살인 사건의 누명을 쓰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로 우뚝 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더 넓고 단단한 나의 세상을 보여주는 책. - 청소년MD 이주은
"고2가 무슨 해외 자원봉사냐.” 담임은 면박부터 주었다. 국제 무슨 단체에서 뽑혀 간다고 했더니, 너 같은 애가 방학 동안 틀어박힌다고 성적이 팍팍 오를 것도 아닌데 그래, 차라리 놀아라 놀아 하면서 겨우 긍정해 주었지만 녀석 제법인데 하는 묘한 표정도 지어 주었다. 천수는 누가 봐도 너무 평범했다. 보통의 키에 보통의 생김새, 보통의 성적을 유지하는 중간치의 아이였다. 천수의 일상 또한 특별할 게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갔고, 학원이 끝나면 엄마 차를 기다렸다. 10시경의 학원가는 활기로 넘쳤다.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를 먹으며 활발하게 욕을 했고 농담을 했고 장난을 쳤다. 그 안에 어정쩡하게 낀 천수는 간식을 먹는 대신 손가락을 뜯어 먹었다. 엄마는 늘 손톱 뜯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사실 천수가 뜯는 것은 손톱 주위의 살 껍질이었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얼뜬 표정으로 손가락을 뜯는 천수에게 눈길을 주는 그룹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천수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 p.26
공짜 콘돔이 열 개. 엄마가 던져 놓고 갔다. 상황이 조금 요상하다. 천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격하게 박동했다. 천수를 구성하는 몸의 기관들이 여기저기서 들썩이고 달달 떨었다. 이 난리를 치는데 오로지 해당 물건의 목적지만이 얌전했다. 적어도 당장 저걸 끼고 싶어서 이 난리를 치는 것은 아니구나, 천수는 가까스로 이해했다. 그럼 이 더러운 기분이 대체 무엇인지 따져 볼까. 천수의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쿵쿵대며 미숙 씨의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게…… 이게 뭐예요?” 미숙 씨 앞에서 천수는 상자에서 콘돔을 주르륵 꺼내 앞으로 내던졌다. 양치질을 하던 미숙 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왜…… 나한테 이딴 걸 줘요?” 천수가 소리쳤다. “얘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여행 중에 필요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 p.54
리디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이는 연거푸 혀를 내밀고 캑캑거렸다. 리디아는 아이의 입술에 묻은 하얀 알갱이를 찍어 맛을 보았다. 아무 맛도 없었다. 이게 뭐지? “패리 여사, 애한테 혹시 뭐 주셨어요?” “아뇨.” 바쁘게 한 소녀의 머리를 빗기던 마거릿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승아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리디아 선생이 작은 아이를 한 팔에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혓바닥을 내밀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뭔가 쓴 걸 먹었나 보네. 약을 잘못 먹으면 저런 표정이 나온다. 어릴 때 할머니 약을 잘못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승아는 얼른 일어나 아이에게 갔다. “얘, 그거 토해야 돼.” 리디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승아를 바라봤다. “토하지 않으면 큰일 나.” 승아의 한국말을 이해할 리 없는 리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바이트! 오바이트요. 우웩!” 승아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리디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휴, 사람 말 되게 못 알아듣네.” --- p.108
“쉿!” 경찰이 몸을 수그리며 해리를 저지했다. “여기 있었어. 방금까지.” 다른 한 명이 코를 킁킁거리며 교실 뒤편으로 다가갔다. 동작이 조용하고 민첩했다. 해리의 눈에 창가 쪽 책상 하나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미치겠네. “저기, 경찰관 나리들!” 해리가 뭘 어쩌기도 전에 크아아아아아! 책상을 뒤집어쓴 승아가 경찰들을 향해 돌진했다. 워어어어. 엉겁결에 뒤로 나동그라진 경찰들을 향해 해리가 몸을 날렸다. 급한 대로 발을 붙들고 가슴팍에 안았다. “미쳤어?” 경찰의 구둣발이 해리의 가슴을 내리치고. 크아아아아아. 책상들이 무더기로 움직이나 싶더니 우어어어어 고함에 이어 책상 두 개가 날아왔다. 그사이 천수와 마거릿이 웅크린 채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정신을 차린 존이 넘어진 의자 하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것들이 정말. 정신 차리게 해 줘?” 발을 붙들린 경찰이 총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