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포구에 배가 닿아 내리는데 집안의 일꾼이 달려와 소리쳤습니다.
“나으리, 빨리 오셔요. 곧 아기가 태어날 것 같습니다.”
“정말이냐?”
안 처사는 한달음에 집까지 달려갔습니다.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안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곧 방문이 열리고 시중드는 어멈 하나가 대야를 들고 나왔습니다. 산파 할멈이 안 처사를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안 처사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부인 신씨 옆에 자그마한 생명이 누워 있었습니다.
“부인, 정말 고생했소. 부인 덕분에 이렇게 귀한 둘째를 얻었구려.”
--- p.12-13
가을이 지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려관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날도 춥고 바람이 너무 무섭게 불어요. 어른이 입을 솜저고리하고 신발 한 켤레를 주시면 안 될까요?”
신씨 부인이 어린 딸을 보았습니다.
“그 옷과 신발이 왜 필요하니?”
려관은 눈물까지 그렁해져서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말했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매일 포구를 헤매 다니느라 옷이 다 해졌어요. 신발도 없고, 발도 상처투성이고요. 겨울이 오는데 떨어진 옷과 맨발로 바닷가에 서 있으니 얼마나 춥겠어요? 옷과 신발을 갖다 주고 싶어요.”
딸의 간절한 얼굴을 보자 부인은 그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 p.20-21
“열 살이 넘은 아들딸은 그렇다 쳐도, 갓 태어난 젖먹이까지 두고 기도한다고 나가다니….”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거친 땅과 바다를 터전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제주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태풍과 폭우, 풍랑 같은 자연재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주 사람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이 일상이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유교를 숭상하며 불교를 배척하고 억압하는 정책이 2백 년 넘게 이어지자 사람들의 마음에서 부처님은 멀어졌습니다.
려관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집 가까이서 관세음보살 부처님을 모시기에 적합하다 싶은 집을 구했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일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에 전념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p.37
“나와서 제주도의 신령님을 노엽게 한 벌을 받든지, 아니면 그 안에서 타 죽든지 어디 맘대로 해봐!”
서슬 퍼런 그들의 고함에도 봉려관은 법당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안 되겠다, 불을 더 놓아!”
불길이 더 거세게 다가왔습니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마저 아득해져갔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봉려관은 법당 구석에 있는 쪽문을 열고 몸을 낮추어 포교당 뒤꼍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저기다! 저기 봉려관이 도망간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습니다.
정신없이 쫓겨 달아나며 봉려관은 한라산 위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밤낮으로 쫓기며 낮에는 숨죽이며 몸을 숨겼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다시 올라갔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쫓는 이가 없었습니다. 봉려관은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에 이르렀습니다.
--- p.90-91
제주도에 도착한 봉려관은 한라산 자락, 지금의 관음사 터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훗날 봉려관이 기도했던 인연으로 ‘해월굴’이라고 불리게 된 곳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봉려관은 석양이 지는 굴 주변의 빈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이 터에 다시금 당당한 부처님 도량이 세워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해월굴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디 이 기도가 하늘에 닿아 우리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도량다운 도량,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삿된 무속이나 미신에서 벗어나 제주의 모든 이들이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 p.102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봉려관은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반년 이상, 거사를 할 시기를 정하고 그동안의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고, 중간에 연락을 맡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웠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지휘를 할 스님들이 법정사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봉려관은 몰래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준비는 차질이 없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 우리 제주도민들이 이를 위해 모였다는 격문을 지난밤 서귀포 시내 곳곳에 붙였습니다. 아마 날이 밝으면 일본놈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봉려관은 모든 일이 잘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법정사에서 지휘를 맡을 스님들이 내려와 마을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법정사 예불에 참석했던 선봉대 34명이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700여 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 p.134
그 말대로 봉려관은 독버섯이나 독초를 정확하게 감별해 언제나 안전한 것만 채취했고, 다른 사람이 캔 나물이나 버섯도 반드시 살펴 가려주었습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기도 정진하며 먹는 공양인데, 혹시나 독초가 섞여 들어가면 큰일이지.”
그날도 다른 날처럼 봉려관은 공양주가 요리할 재료에 혹시나 독초가 있나 살피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잠시 후 공양주는 공양간으로 들어가 저녁공양을 준비했습니다. 그러고는 봉려관과 함께 채취한 버섯으로 국을 끓였다면서 봉려관에게 먼저 올렸습니다.
그런데 한 숟갈, 두 숟갈. 봉려관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딱 두 숟갈 그 버섯국을 입에 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막히게도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 p.168-169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운 여장부, 봉려관 제주 화북에 들꽃과 바람과 파도를 사랑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훗날 우 리는 그 소녀를 봉려관스님이라 부릅니다.
1899년 집 앞을 지나가던 스님으로부터 자그마한 관세음보살상을 건네받은 안려관은 그날부터 관세음보살 기도에 전념했고, 훗날 1907년 해남 대흥사에서 승려가 됩니다.
근대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 봉려관은 갖은 핍박을 인내하면서 1909년 봄, 가시덤불이 뒤엉키고 축축한 기운이 휘감아 도는 한라산 중턱에 관음사를 홀로 창건합니다. 마침내 200여 년간 지속된 제주불교 암흑기를 끝내고 근대 제주불교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걸 묵묵히 홀로 견디며 써 내려간 봉려관.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1년간 제주불교를 재건하고 중흥시키는 것이 생활이었던 봉려관의 발취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수차에 걸쳐 왜곡되었고, 고의로 지우는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더욱이 봉려관의 업적을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둔갑시키는 등 사사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추측이나 상상을 공적인 역사 사실로 내세우는 일이 부끄럼 없이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동안 누가 진심으로 봉려관에게 관심을 가졌던가! 이제 더 이상 제주불교계를 비롯해서 비구니계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은 봉려관에게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봉려관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봉려관스님이 입적한 지 8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봉려관 생애가 세상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봉려관스님의 생애만큼이나 단단한 필치로 스님의 전 생애를 그려낸 윤필 작가, 각 장에 시적인 향기를 불어넣어 준 이향순 작가, 새로운 눈으로 참신하면서도 따뜻하게 봉려관스님을 그려 준 루스 앨런, 아이 어른 모두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세심하게 글을 다듬어 준 이지안 편집자에게 봉려관을 대신해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애초 귤꽃 향기 그윽한 5월에 내려던 계획이 늦어져 음력 5월 28일 82주년 봉려관 다례제에 맞추어 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다듬어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합니다.
이 책을 대하는 사람마다 용기와 마음의 평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 10월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원장 혜달
--- 「감수자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