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의 행동을 보면서 옮긴이는 자그마치 철학의 핵심 질문을 되새겼다. 플라톤이 평생 답하고자 애썼던 질문.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억울한 일 안 당하고 남에게 원한 살 일도 안 하고 사는 것이 최선임은 두말 하면 잔소리이겠지만, 세상이 형편없어서인지, 우리 인간이 주제넘게 정의를 내세워서인지, 억울한 일은 생기기 마련이므로, 질문을 더 좁혀보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
공연히 문제를 키우지 말고 꾹 참기, 억울하다는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훌훌 털어버리기, 보란 듯이 출세해서 다시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등을 바람직한 대응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콜하스는 쩨쩨하고 어리석게도 법에 호소하여 정의를 회복하려 한다. 그는 개인 차원에서 억울함을 삭히거나 금전적 손실을 만회하려 하는 대신에 “온 힘을 다해 굴욕에 대한 배상을 받아내고 동료 시민들을 위해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느낀다.
콜하스처럼 억울하여 법에 호소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맞서 싸우는 상대가 최고 권력층임을 깨닫고 나서도 정의 실현의 요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콜하스는 정말이지 돈키호테처럼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빈다. 법은 올바른 사람의 편이어야 한다는 당위 명제는 그에게 힘없는 자들의 넋두리이거나 공허한 구호가 아니다. 현실의 법이 힘 있는 자들의 편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법의 역할을 스스로 맡기로 결심한다.
이 대목에서 콜하스는 우리 주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인물로 부상한다. 그는 스스로 판결문을 작성하고 명령문을 공포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폭력으로 정의 실현에 나선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억울한 일을 당하고 법에 호소했는데도 소용이 없을 때, 폭력을 써서라도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 잘 하는 행동일까?” 옮긴이는 콜하스가 무력보복에 나서는 장면에서 한편으로 통쾌함을 느꼈음을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 법의 대안일 수 없을 것이다. 콜하스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폭력에 의지하는 이야기는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법이 제 구실을 못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깨우쳐주는 듯하다.
또 하나, 폭력을 통한 정의 실현 못지않게 문제적인 것은 용서의 거부이다. 콜하스는 부당한 짓을 한 상대를 끝내 용서하지 않는다. 최고 권위의 성직자와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화신인 듯한 신비로운 조언자가 용서를 권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고자 한다.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보면 분명 어리석고 괘씸한 행동이지만, “아이들도 이다음에 크면 자신의 행동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콜하스의 말이 암시하듯이, 사회 차원에서 보면 그릇된 행동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는 것을 일깨우는 올바른 행동일 수 있다.
결국 콜하스는 사소한 일에 분개하여 날뛰다가 죽음을 자초한 멍청이거나 법과 정의를 신봉하여 장렬하게 순교한 영웅이다. 어찌 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의 화신(化身)인 것도 같다.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문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곡예에 가까운 문장이다. 게다가 거기에 담긴 이야기의 밀도가 실로 감탄스럽다. 문장 하나, 심지어 문장의 한 부분에 들어있는 이야기만 해도 풀어내면 한없이 많을 것 같아서 마치 프랙털을 보는 듯하다. 이야기 하나를 열 문장으로 늘여놓는 작가가 있다면, 클라이스트는 거꾸로 이야기 열 개를 한 문장으로 응축하는 작가다.
풍부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 뚜렷하고도 미묘한 갈등 따위의 요소들이 영화나 연극에 어울릴 법하다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세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번역본을 영화만큼 재미있게 읽는 독자가 많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차근차근 두세 번 읽어야나 이해가 되는 문장들이 적잖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수의 독자들은 이 땅의 산문 풍토에서 그리 선호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매도되는 얽히고설킨 문장, 쉼표가 예닐곱 개 나오고 길이가 대여섯 행에 달하는 문장에 색다른 쾌감을 느끼리라고 믿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