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으로 가면서 경산신문사의 최승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포도밭에서 일을 하다가 작업복을 입은 채로 나왔다. 경산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서는 분이라서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2007년부터 이 코발트광산의 발굴에 참여하고 그 내막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와 함께 광산으로 향했다. 최 대표는 이 소설의 무대가 된 대명리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소설의 무대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분이었다. 그가 말해주는 코발트광산의 실체는 참혹했다. 광산 아랫마을의 평산동 아이들은 어렸을 때 마을 뒷산에서 뼛조각을 주워서 뼈맞추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고 했다. 산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사람의 뼈인지라 그것이 특별히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있는 놀이였다는 것이다. 코발트광산은 수직굴 2개와 수평굴 2개가 있는데 거기가 좁아 더 이상 매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산에서 죽인 그대로 흙만 얇게 덮어 놓았는데 그것이 세월이 가면서 유골이 드러난 것이다. 산 아랫마을의 아이들은 그 참혹한 역사는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1부, 이동하의『우울한 귀향』-경산, 한번은 오밤중에 눈이 뜨였다」중에서
소설의 무대를 찾아서 폐코발트광산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은 참혹했다. 저 문 닫힌 폐광의 슬픔을 누가 울어 줄 것인지, 저 속에 갇힌 이들은 언제 그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광산에 묻고도 전쟁은 계속되어 동구 밖으로는 피난민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이른 아침에 동구로 나가보면 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강변에 난민들이 하얗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냄비밥을 끓이고, 마을에서 날된장을 얻어다가 비벼 먹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같은 전쟁 이야기였다. 철길 위로는 젊은이들을 실은 기차가 북으로 올라가고 부상병들을 실은 기차가 후방으로 내려갔다. “북으로 올라가는 기차에서는 우렁찬 군가가 흘러나왔고, 남으로 내려가는 차에선 조용한 침묵 속에 흰 붕대들만 어른어른 내비쳤다.” 그리고 윤은 삼촌이 기차에서 편지를 날려 보내줄까 해서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 그루 나무처럼 동구에 서 있곤 했다.
---「1부, 이동하의『우울한 귀향』-경산, 한번은 오밤중에 눈이 뜨였다」중에서
너무나 깔끔하게 정비된 남천을 보면서 거기에 외나무다리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근찬의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 다리를 건너며 영천전투와 불구가 된 부자 이대의 아픔을 체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산다. 이제 전쟁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지고 중앙선을 달리는 영천 역사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나 수많은 상이군인들이 절망과 고통에 괴로워하며 드나들었을 역사는 하근찬의 소설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에게 문학적으로 전쟁을 증언하는 능력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몫이 아닐까.
---「1부, 하근찬의『수난이대』-영천, 신세 조졌심더」중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고 그와 연관되었던 사건들도 사라져 가고 그가 썼던 사물들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간다. 사라져 가는 자리에 또 다른 것들이 들어서지만 사라진 사람의 자리는 쉽게 비워지지 않는다. 바로 기억 때문이다. 문학비 위에 덮어 두었던 흰 천이 걷히며 김성도 문학비가 드러날 때 나는 그토록 대단한 사람의 문학비가 그토록 초라하다는 것에 놀랐다. 문학비가 모두 그런 것인 줄 그때 알았다면 별것 아닌 기억이겠지만 환한 햇살 아래 드러난 작은 문학비가 김성도의 이름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다는 것은 젊은 나의 생각이었다. 이제는 그런 문학비조차도 한 사람을 기억하는 데는 너무나 훌륭한 사물임을 안다. 와촌의 고향 마을에도, 그의 집이 있었던 청라언덕에도, 그의 동요와 동화가 창작되던 계성학교에도 그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곳을 서성이며 그를 기억한다. 골목 가득히 울려 퍼지던 그의 노래와 함께.
---「2부, 김성도의 〈어린 음악대〉-대구,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중에서
올라가는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고, 높은 산 중턱인지라 도대체 여기에 무슨 생가터가 있나 싶었지만 막상 올라가 보니 아직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담도 있고, 여기저기 감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상도는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은 꼭 키우는데 수풀이 우거진 산중턱쯤에서 감나무가 여기저기 보이면 거기에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여기저기 무덤이 많은 것을 보니 사람들은 낮은 산 아랫마을로 내려가고 터가 좋아 보이는 그곳은 무덤 자리로 변한 것 같다. 시간이 있으면 하나를 더 보여 주겠다는 아저씨를 따라가니 가시밭길과 숲을 헤치고 커다란 돌 하나를 보여 준다. ‘곡구谷口’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돌이다. 야은이 어릴 적 썼다는 글씨로 원래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곡 아래에 있던 것을 가까운 절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을 다시 가져와 거기에 놓았단다. 그런데 그건 거기에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아랫마을 계곡 입구의 ‘방오지’라는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는데 사람들의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엉뚱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물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 법인데 그것이 산허리쯤에 놓여 있으니 글씨의 의미마저 퇴색되고, 그 돌을 보여 주는 아저씨가 도리어 나한테 그 글자의 의미를 물으니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할 야은 선생의 유적이다.
---「2부, 야은 길재의「회고가」-구미,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