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개정 5판을 내면서)
우리 민법의 주된 이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적 자치(私的 自治)’이다. 이 원칙의 핵심은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에서는 개인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만 권리와 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이다. 조세법 개정 시 고뇌를 필요로 하는 요소이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민법전 없이도 각종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매매 또는 증여계약 시 민법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 부지불식 민법규정보다 당사자 간 합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매, 증여계약 시 자신들 의지와 관계없이 적용되는 양도소득세 비과세, 증여 시 부담하는 세액 등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현실이다.
근대 이전의 조세는 매매, 증여 등 법률행위와 관계없이 사실행위, 즉 토지에 노동을 투입하여 생기는 수확량 중 일부를 납부하는 현물지대였다. 소위 왕토(王土)사상 아래 토지는 모두 왕의 소유였다. 왕이 땅을 하사하는 것은 토지소유권이 아닌 토지수확물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의 부여에 불과했다. 그 수조권의 세습여부도 왕의 의지에 달렸다. 과전법(科田法)이 수조권의 세습을 인정한 경우이고, 직전법(職田法)이 원칙적으로 배제한 경우이다.
조세라는 용어를 오늘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언어일반의 경로의존적(path dependent) 현상에 불과하다. 중세봉건사회의 지대국가에서 근대시민사회의 조세국가로의 전환은 헨리 메인의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말로 압축된다. 이러한 근대시민국가의 탄생배경에는 근대계몽사상가인 홉스, 로크, 루소 등의 위대한 사상, 즉 사회계약설이 있었다.
근대 이전 신분사회의 노비는 납세의무도, 국방의무도 없었다. 사람이 권리의 주체가 된다는 원칙은 오랜 역사의 진통이 있었고, 이 권리의 주체는 자유인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납세주체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지대국가에서 벗어난 조세는 자유인의 자발적 부담이다. 따라서 자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자유를 생활관계에서 보장하기 위한 법적 수단이 사적 자치의 원칙, 법률행위자유의 원칙이다. 나폴레옹이 40여 차례의 승전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민법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이유는 민법전이 사회계약설이라는 위대한 사상에 바탕한 법전이기 때문이다.
민법의 핵심이념인 사적 자치의 원칙 아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자유인이 얻은 부(富)의 일부이전이 근대조세이다. 사적 자치의 원칙은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면서 근대조세를 발생시키지만, 근대조세 역시 사적 자치의 원칙에 영향을 준다. 즉 사법과 조세법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적 자치와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와 조세는 자동차 바퀴 네 개와 같다. 어느 하나의 바퀴에 문제가 생기면 자동차 전체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적 자치의 원칙 아래에서도 조세법상 유리한 법률관계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세법이 사법화되었다고도 한다. 사적 자치의 원칙과 충돌되는 부분 중 하나가 세법의 부당행위계산부인규정이다. 하나의 경제활동에 민법상 법률효과와 세법상 법률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세법은 국세기본법과 국세징수법을 중심으로 미세한 그물처럼 연결이 되어 있다. 이번 개정에서는 조세법 상호 간의 연결고리와, 조세법과 민법의 상호영향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1960.1.1. 신민법 시행 후 처음으로 100개가 넘는 조문을 개정한 새로운 성년후견제도에 대하여 민법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조세법적 시각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2013.7.1. 시행된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는 종래의 금치산, 한정치산제도의 문제점을 줄이고자 어렵게 탄생한 새로운 제도이다. 종전 후견제도와의 차이점 중 주요부분을 살펴보면, 후견대상을 중증 정신질환자에서 치매노인 등 고령자까지 확대하고, 배우자, 직계혈족 등으로 민법에서 정해 놓았던 법정후견인을 가정법원이 정하도록 하고, 후견인 수를 자연인에 한하여 1인으로 하던 것을, 법인에게도 허용하면서 나아가 복수로 후견인을 허용하였다. 종전에 없었던 후견계약제도가 생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법원이 자신의 미래운명에 영향을 주는 대리인을 결정하는 우려에 대한 유일한 예방책이라 할 수 있다.
피후견인의 재산권행위와 신분권에 대하여 제3자가 과연 가족보다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타당한가? 민법 제936조 제4항은 성년후견개시심판에서 본인의 의사를 고려하여야 한다고 하는 데 비하여, 성년후견인의 선임에서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선언한다. 현실은 재산상 다툼 있는 미래상속인이 후견신청을 하는 경우 대부분 제3자 후견인을 선임한다. 미래상속인들의 재산다툼에 성년후견제도가 무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후견청구를 철회하지 않는 한 미래의 피상속인은 법원에 출석해서 재판부 심문을 받고 의사의 감정을 통해 정신상태를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본인의 의사보다는 가족들의 의사가 존중되는 것이다. 마치 재산권에 관한 식물인간이 될 수 있는 미래 위험에 직면한 현대인의 고뇌가 엿보인다.
피후견인 재산관리의 주요부분은 조세이다. 재산의 처분행위에 수반되는 조세채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시민국가는 조세국가이고, 모든 경제활동은 민법의 적용과 동시에 조세법이 적용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새로운 성년후견제도와 관련하여 단순하게 민법규정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대리하여 재산권에 관한 법률행위를 할 때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조세법의 위험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하였다. 재산권에 관한 법률행위의 유효, 무효를 넘어서서 예측하지 못한 조세채무의 발생으로 피후견인의 불측의 손실은 물론 대리인으로서의 책임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우리보다 이를 10여 년 먼저 시행한 일본의 사례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011년에 개정판을 내고, 그 후 예상하지 못한 개인적 사정이 생겨서 개정작업을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독자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세철학에 위대한 사상이 있었다. 그 위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조세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조세철학, 사상이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면서 다음에는 좀 더 충실한 개정내용을 반영할 것을 약속한다.
2020년 9월
저자
---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