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가 잘못이라는 사실로부터. 사실을 증명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상황으로부터. 짐인지 모르고 살아왔는데 짐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인식했다. 등이 살짝 가벼워지고 나서야, 짐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다시 뺏겼을 때, 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내게 더 큰 독이 되어 찾아왔다는 것을. --- p.29, 「잘못한 것만 잘 못 잊어」 중에서
작가는 딱히 의도 없이 적은 글도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나서는 대단하다고 치켜올리거나 이 부분은 아쉽다며 평가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물론 모든 평론가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런 평론가의 글을 읽고 나서는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 p.45, 「추어탕」 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잔인한 것 중의 하나가 내게는 ‘정’이라는 놈이었다. 인간이란 결핍의 존재다.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 p.64,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있잖아. 봄 하면 생각나던 꽃. 위로 올려다볼 때는 햇빛을 머금은 듯 너무 하얗지만은 않은 빛깔에 사로잡혀 주저 없이 올려다보며 핸드폰에, 카메라에, 눈에 담는 꽃. 반대로 내려다 보게 될 때, 우리 곁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내려왔을 때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꽃. 꽃이라는 인식조차 없이 밟는 꽃. 봄이 완연해 지면 알아서 흙이나 도로와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버려 땅으로 돌아가는, 자연이든 사람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꽃, 말이야. --- p.84, 「물들면 목련이」 중에서
내가 말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아니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망쳐놓았다. 할머니의 계란을 터뜨렸다. 노랗다. 노래졌다. 모든 것이. --- p.106, 「모두 계란 한 개씩은 품고 있지」 중에서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순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교과서로 영상으로 이해는 해도 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경험 없는 이해는 결국 공감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 p.144, 「김치부침개」 중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것.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드리우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궁금한 것들이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기포처럼 떠오르고 터지고를 반복했다. --- p.174, 「죽음」 중에서
사람이라는 게 ‘공감’이라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실제’에 수렴할 뿐 실제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닥치고 나서야 안다. 자신이 하는 것이 이해를 넘어선 공감이라는 교만한 생각으로 자신은 잘 위로했다고 자위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위로가 민물고기에게 주는 바닷물과 같은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 p.196, 「이해가 공감이 될 때」 중에서
오래 살고 싶다.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아프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별거 없다는 걸 알아도, 하루만 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 --- p.233, 「60대」 중에서
그리고, 심란한 데다가 괜히 내 정신적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지. 심란한 맘을 가진다고 나아지면 백번 천번 갖겠지, 안 그래? 그리고 말이야, 흠, 그래 나한테는 지금 무지 심각한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않거든. 이해해줄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거든. --- p.275, 「고민」 중에서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보지 못해왔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내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사실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데 말이다. --- p.288, 「눈물」 중에서
신앙이든 믿음이든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신념이나 가치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들어 가야 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실생활에서 쓰지 않고 묵혀두면 잊어버리면 언어처럼 계속 입에서 머릿속에서 굴려야 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 p.326, 「신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