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비상등을 켜고,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우고, 뒤차에 손을 흔들어 양해를 구하고, 고양이를 안고, 다시 차에 타서, 식당이 아닌 병원으로 갔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10초면 충분했을 일이다. 그 고양이를 구하는 일이 20대 후반 끝자락의 나를 구하는 일이 되었을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로 나에 대한 혐오감이 커져 갔다. 그 대상이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한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보다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찾아왔다. 한동안 내 인생은 회전교차로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맴돌기만 했다. 그 친구에게도 나의 민낯을 보인 것 같아서 민망했고 그만큼 못난 이유로 멀어지고 말았다.
- 김민섭, 「그때 그 고양이를 구했더라면」중에서
뇌이쉬르마른은 카펫이 많은 곳이나 먼지가 있는 곳을 몹시 두려워한다. 털이 천식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털이 많은 인형도 무서워한다. 좌우간, 뇌이쉬르마른은 무게감과 놀고 돌아온 날에는 천식이 심해진다. ‘얘를 사랑해서 내가 아프다. 얘가 내 호흡기와 기관지에 염증을 일으킨다. 얘를 향한 사랑이 나의 기관지에 근육 수축, 점액 분비, 발적 부종, 쌕쌕거림, 기침, 가슴 답답함을 일으킨다. 사랑 때문에 나는 노력성 호흡을 한다.’ 뇌이쉬르마른은 중얼거린다.
-문보영, 「노력성 호흡」중에서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 이거였다. 나는 갑자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지구상의 중요도에 있어서 김도 못 되고, 김 위에 바르는 기름도 못 되고, 그 기름을 바르는 솔도 못 되는 4차적인(4차 산업혁명적 인 것도 아니고 그냥 4차적인) 존재이지만, 그래서 범국민적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보는 순간, ‘세상에 이런 물건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김솔처럼) 잊고 있던 다른 무언가에 대한 재인식을 동시에 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 인식이라는 것들이 딱 김에 기름 바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김솔통. 드디어 찾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 두괄식을 만들어 줄 첫 문장.
- 김혼비, 「마트에서 비로소」중에서
언젠가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홉 살 때였다. 장래 희망과 그 희망을 갖게 된 이유를 적어 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반 전체가 일순 술렁였다. 내일까지 제출하면 된다는 말에 모두들 안도했지만, 하교할 때 우리의 책가방은 사이좋게 무거웠다.
- 오은, 「작가의 말」중에서
서로를 잊고 어디서 무얼 하며 살아가든 한때 내 친구였고 때론 내 슬픔이었던 소녀들아, 나보다는 행복해라. 내가 만져 보지 못한 유아차도 끌어 보고, 내가 가져 보지 못한 행복한 가정 안에서 평화롭길 바란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찌들지도 말고, 예고 없이 가족을 잃지도 말고, 밥 먹는 시간이 외롭지도 않길 바란다. 정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옛 친구와의 악수나 포옹이 버겁지 않을 만큼 별일 없이 늙었으면 좋겠다. 누가 먼저 떠났건 누가 먼저 잊었건 그건 그 시절의 사정일 테고, 부디 서로의 부고로 만나지는 말자. 언제든 파전에 막걸리는 내가 살 테니, 너희는 한 잔 술 받아 마실 멀쩡한 간만 챙겨 오너라.
- 이은정, 「한때 내 친구였던 소녀들아」중에서
그 방에서 나는 딱 한 달을 ‘생존’했다. 그야말로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연속된 투쟁이고 시고 불행이고 나발이고 그냥 오달지게 추웠다. 물을 떠서 두면 당연히 얼었다. 음료수도 밥도 라면도 다 얼었다. 방에 들어와도 외출복을 벗을 수 없어서 외출복 차림으로 24시간을 살았다. 대신 더럽게 큰 창문 덕택에 바깥 광경이 그대로 보였다. 운치가 있기보다는 그냥 바깥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중국이나 인도 유학생이 살고 있는 방이 조금 더러워도 차라리 따뜻해서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도 그리워졌다. 중국인과 인도인이 부러웠다. 중국과 인도라는 국가까지 부러웠다.
- 남궁인, 「그냥 오달지게 추웠다」중에서
어느 날 나는 방 안의 방 안의 방 안의 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감정을 어떻게든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하나둘 쌓아 탑을 완성하는 마음으로, 틈을 발견하고 그 안에 책과 신문을 집어넣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 썼던 글들의 제목은 「은둔하는 말에 관하여」, 「그 작은 동굴에서 한 여자」처럼 고립과 고독과 고통을 담고 있었다. 정리와 정돈과 정렬처럼, 고립과 고독과 고통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 오은, 「정리와 정돈과 정렬과 고립과 고독과 고통과」중에서
종종 내가 있고 싶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곳에 내가 혼자 있는 일은 없다. 이상적인 곳에서든, 아름다운 시간에서든,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기꺼이 사랑과 선을 베풀며, 나에게 호의적이고,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내가 얻고 싶은 것, 지키고 유지하고 싶은 것, 이루어 가고 싶은 것은 모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래전, 계란프라이를 하나 구워서 내 방에서 같이 나눠 먹으며 책을 읽던 여동생이 있었던 시간,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깔깔대고 기웃거리며 방해하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시간, 같은 것이다. 그저 그런 시간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에게, 내 방에, 나의 어느 공간에 그렇게 존재하길 바란다.
- 정지우, 「방에 있는」중에서
2008년 여름 나는 의과대학 졸업반이었다. 학교를 다닐 만큼 다녔고 놀 만큼 놀았던 참이었다. 의대생 시절 나의 모토는 ‘의대생이 하지 않을 것은 모조리 다 해 보자’였다. 이미 대륙 횡단을 세 번 다녀왔고 중국에 어학연수도 갔으며 국토대장정도 마쳤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나름대로 시까지 쓰고 있던 좌충우돌 졸업반이었다. 알다시피 이 중 하나만 건드려도 이번 글은 훌쩍 지나간다. 다시 그해로 돌아와서, 나는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을 정리하는 또 다른 여행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하면 더 최종적으로 재미있게 놀까 궁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남궁인,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 그는 누구인가」중에서
가끔씩, 이를테면 앞의 문장 같은 걸 쓰기 위해 결혼한 지 몇 년이 흘렀는지 따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벌써 7년이라고? 진짜? 아무래도 우리의 하늘이 겹쳐져 만들어진 작은 우주, 점성학의 세계에서는 진작에 파국을 맞았을 우리가 그에 맞서 개척해 낸 평행우주 속에서 유영하듯 살다 보니 지구의 시간을 자꾸 잊어서 그런 것 같다.
- 김혼비, 「합쳐서 뭐가 될래?」중에서
가지지 못했던 예쁜 아침을 보았고 아직 오지 않은 여유로운 저녁을 만난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내가 쥐고 태어난 명줄의 절반쯤 살았다고 가정했을 때, 절반씩이나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날을 쓸데없음과 함께했을까 곰곰 곱씹어 보았다. 곱씹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가 서둘러 지워 버렸다. 살면서 내가 저지른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은…, (실제로는 넘치고 넘쳐서 취합하기도 힘들지만)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지 않은 순간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모든 멍청했던 나도, 모든 아팠던 나도, 이제는 소중한 나만의 역사가 되었다. 지나 버린 언젠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내 것이라 한들 100퍼센트 믿을 것이 못 되고 특정한 기억에 대한 감정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므로 단정하는 순간 그런 과거로 남기 마련이다. 내 인생은 이제 겨우 점심시간인데 쓸데없는 회상으로 채우기엔 햇살이 너무 뜨겁다.
- 김혼비, 「합쳐서 뭐가 될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