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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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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80g | 128*208*7mm
ISBN13 9788960215252
ISBN10 896021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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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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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허한 구석이 있다 허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람의 철칙, 몰아치며 부는 바람이 내 눈으로 침투한다 내 눈에도 빈자리가 크다 눈물샘이 고비사막의 호수처럼 말라버린 걸까 눈을 감고 생의 비늘을 지키자 2억 4천5백만 년 전, 물고기였을 때를 생각하며 퇴화된 아가미를 부활시키자 아가미를 잎사귀로 진화시킨 저 나무들처럼 귀를 열고 입을 열고 바람을 대하자 내 마음의 허기를 향해 바람이 분다, 감미로운 독주다 봄의 등짝을 뒤집어 보자 껍데기를 열고 닫는 하루의 일과를 벗어버리자

한쪽 뺨을 접어 다른 쪽 뺨을 두들기자 부드러운 솜털을 따라 푸른 혈맥이 풍기는 풋내를 맡자 눈물샘이 솟을 것만 같다 오늘은 바람의 채찍으로 졸고 있는 젊음을 밀어붙여 보자, 용서할 수 없는 일들과 손끝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불면의 꿈들을 향해 허공의 미로에서 나의 그림자가 산란할 때, 흩어지는 푸른 비늘들이 진언을 구하고 아카시아 꽃잎들이 나뒹굴고 송화가 산을 차고 오를 때 오월은 능숙하게 때를 알아차린다 깃발이 혀처럼 일어나 춤춘다

바람이 간다 내 눈을 통과하여 망각의 그물을 찢고 몸을 화살처럼 겨누고 간다 독백의 힘이다 세상이 기우뚱한다 아이들이 뛰고 시간의 겨드랑이가 열리고 나무의 손끝이 바람의 옆구리를 연주한다 빛의 공명이 그리움의 공간으로 포집된다 나무의 몸이 열리고 긴 울림통으로 바람의 선율이 몰려든다 숨소리를 토하며 바람이 운다 울음 안으로 가야겠다 울음통이 되어 허한 구석으로 몰려가야겠다
---「바람의 경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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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산모롱이에 반백 년 연륜을 지닌 크낙한 낙엽송 한 그루 지그시 눈 감은 채 바람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며 서있다 올바른 세상의 꿈을 향해 먼 길 뚜벅뚜벅 걸어오는 동안 몸피 곳곳에는 붉은 생채기들이 물결을 이루었고 아가미가 진화해 만들어진 그의 보드레한 잎들은 쓸쓸한 존재들의 상처를 쓰다듬는 따듯한 시의 손길이 되었다 바람으로 빚어진 그의 몸은 발아래 쌓인 노란 낙엽 같은 눈물겨운 이야기를 데불고 먼 산 소쩍새 울음소리를 향하여 다시 허위허위 바람처럼 나아갈 것이다
- 류지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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