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의 의미

삶의 단위 중, 시時도 있고 분초도 있지만 그래도 처음과 끝이 어느 정도 구별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하루’라고 생각했다. 교단생활 중 담임을 하는 내내 ‘하루가 하루되게 하자’를 급훈으로 삼았고 관리직일 때도 훈화 시간에 많이 강조했다. “지나간 시간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지금 이 시간 이 하루를 의미 있게 잘 살면 그것이 모여 한 달 그리고 일 년이 되고 나아가 한평생이 됩니다.” 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정작 나의 하루는 속이 차지 못하고 헐렁하게 지나간 날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하루’를 놓지 않고 있어 시의 제재나 시어에는 계속 등장한 것 같다. 이번에 내는 시집 ‘하루를 건너며’ 제목도 그런 연유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하루’도 진화를 하여 요즈음 나에게 있어 ‘하루’는 특별한 경지에의 추구라기보다는 평범의 이해와 완성이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 평범을 깨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은 것이다.

2. 단락 별 모음에 따른 의미

1) 소망

제1부는 ‘방 한 칸만’이다. 퇴직해서 고향집에서 생활한지도 어느덧 10년이 나 되었다. 한옥을 약간 개조한 정도이니 불편한 점도 있다. 그러나 물려주신 어른들의 체취와 흙냄새, 풀냄새, 새소리가 가까이 있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득 보니 이 집에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산새도 날아와 둥지를 틀고 길고양이도 마루 밑에서 새끼를 낳았다. 그것뿐인가, 개미며 심지어 잡초까지도 가득하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들도 나와 고향이 같은 것이 확실하다. 욕심내지 않고 방 한 칸만 사용하기로 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 흉내라도 내는 것이 고향집에 사는 이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 벗어나지 못할 무게

제2부는 ‘자물쇠 거리에서’이다. 주로 여행 중 보고 느낀 것이다. 퇴직 전에 많은 여행을 못했지만 퇴직 이후는 국내는 물론 외국도 제법 여러 곳 다녀왔다. 여행의 매력이라면 일상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그러하지만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 속에 있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다. 발칸반도 크로아티아의 마카르스카에 예수로부터 건네받은 베드로의 열쇠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에서 자물쇠를 걱정하고 있었으니 정말 무언가를 잠그고 또 그것을 열고자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벗어나지 못할 무게인 것 같았다.

3) 추억

제3부는 ‘을숙도 그 섬은’으로 묶음을 했다. 2)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행을 하는 내내 모두 쫓기거나 애련 속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여행 본래의 목적인 망중한忙中閑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그곳 특유의 삶과 환경이 발길을 머물게 했다. 꽃과 나무, 새들에게는 여느 곳과 다른 그들의 언어가 있었고 그 지역의 성곽과 장터 또 마을에는 그들만 지닌 호흡이 있었으며 돌과 길, 폭포, 정자에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 못 할 몸짓이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은 오랜 추억이 되었다.

4) 거룩한 뜻

제4부는 ‘솔과 솔 그늘’로 묶었다. 퇴직 이후 고향 청도로 돌아오면서 인터넷에 ‘청도문학신문’이란 까페를 하나 마련했는데 그곳에 청도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게 나를 키워준 고향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청도 곳곳에 발품을 꽤나 팔았다. 사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이름 정도만 알던 마을이 대부분이었는데 직접 탐방을 하니 멀리서 막연하게 생각하던 모습이 또렷한 형상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이 자료들이 ‘청도향교지’와 ‘청도마을지’ 자료로 활용되었고 지금은 ‘청도신문’에 ‘청도의 서원과 재실, 고택 탐방’이란 기획물로 연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시집 ‘청도에 살어리랏다’의 중심 소재가 된 것이다. 이 번에도 앞의 시집에 담지 못한 글들을 옮겨놓았다.

5) 건강

제5부는 ‘술 생각’으로 묶었다. 큰 시련 하나가 있었다. 2013년도에 대 수술을 받은 것이다. 4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병으로 결근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건강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년 퇴임식’에서도 아직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고 눈과 귀도 밝고 이[齒]도 전부 내 것이며 약도 먹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퇴임 3년 뒤 건강검진 때에 대장에 덩어리가 발견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큰 태풍이었다. 처음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많이 당황하고 방황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절망’보다는 ‘희망’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최선의 방어’는 ‘최대의 공격’이란 생각을 하며 움츠려 물러서지 않고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아니 오히려 병을 잊어버리기 위해 더 많은 일에 몰두했다. 문화연구 모임이나 문협 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틈틈이 외국여행이나 국내여행도 하고 청도탐방도 계속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까페와 블로그에 올리고 발표한 시들을 정리하여 시집도 내었다. 아무튼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5년이 지나 완치판정을 받았다. 5부에 실린 시들은 그때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제 아내와 같이 술 한 잔을 해도 될 것 같다.

6) 조금 다른 운율

6부는 ‘억새’로 묶었다. 평소 시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시조 종장 초구에 관한 연구’란 논문도 내고 몇 편의 시조로 수상도 하고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조보다는 주로 쓴 것은 수필과 현대시이다. 그래도 시조로 몇 편 써둔 것이 있어 이번에 같이 올려보았다. 자칫 단순한 형식 살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시조의 독특한 구조와 운율은 따르지 못한 것이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다.

3. 시

시는 언어예술인 문학의 영역에서 가장 오래 동안 시인들의 영혼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런데도 아직 시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가?” 란 질문은 계속 진행 중인데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없는 것 같다. 이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란 T.S. 에리어트의 말과 같이 시작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다만, 여러 시인이 시를 써오며 공감하며 동의하는 몇 가지 공통점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시인들 특유의 기법과 습관, 특성이 모방되고 진화되는 것 같다. 나는 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우선 나도 알고 남도 이해하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요즈음 시들 중 난해한 작품들이 많다. 독자와 합의되지 않은 난해성 때문에 어려워서 도저히 읽기가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함축성이란 시어의 특성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상징성과 모호성이 있고 원관념이 보조관념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만 너무 덧칠하거나 주관적인 표현은 곤란하다. 아무튼 나도 알고 남도 이해하는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며 살피고 있지만 아직도 시작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하고 늘 배우는 입장에서 글을 쓰고 있다.

고향집에 딸린 밭이 있는데 거기에 꽤 많은 종류의 과일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그 중에 살구나무가 가장 적응을 잘 하여 세력이 왕성하고 열매도 풍성하다. 마침 집 앞에 ‘杏田글밭’이란 표석을 하나 세웠는데 이 때 ‘杏’은 은행나무의 뜻이지만 또 ‘살구’란 뜻도 있어 살구가 잘 되는 것이 나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살구는 꽃이 화사하여 봄날의 정취를 가득 담을 뿐만 아니라 주황색 과일은 살짝 눌러 두 쪽을 내면 씨와 육질이 쉽게 분리되어 손이나 입가에 묻지 않는, 그래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멋쟁이다. 이번에 내어놓는 시집 ‘하루를 건너며’에 담긴 시들도 독자의 손이나 입가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역시 부족하여 부끄러울 뿐이다.

1971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수필) 및 1994년 교육신문 현상모집에 수상, 2010년 서정문학 시부문에 당선한 시인이자 수필가인 박영환 시인의 『청도에 살어리랏다』 에 이은 두번째 시집 『하루를 건너며』 가 발간되었다. 박영환 시인은 40년 교단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청도에 정착하여 마을 곳곳을 탐방하며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 역사를 발굴하고 고향을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고향인 청도를 사랑하는 시인, 삶의 연륜을 바탕에 깔고 고르고 넉넉하게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들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시인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삶을 관조하는 깊이와 서정을 느끼게 한다. <br/><br/>아침에 깨울 아이가 있고<br/>손을 잡고 같이 잠들 아내가 있고<br/>인사를 드릴 부모님이 계셔서 좋다<br/>또 이웃과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br/>산다는 것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br/>서로 보살피고 사랑하고 받들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br/> <br/>오래전 일기장에 적힌 구절이다<br/> <br/>오늘 아침 서울에 있는 외손자 종훈이와 통화를 했는데<br/>엄마가 깨웠다며 불만이 대단하다<br/>제 어미가 말한다<br/>아침마다 학교 가라고 깨우느라 전쟁통이란다<br/>그 소리를 듣고 아내가 한 마디 한다<br/>“제 어미 깨우느라 우리도 꽤 전쟁을 했지요”<br/>하면서<br/>“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br/>씁쓸한 미소를 짓는다<br/> <br/>이제는 깨울 아이는 전부 제짝을 찾아 흩어져 있고<br/>부모님도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다<br/>고향집 이 방 저 방이 비어 있다<br/>그래도 같이 이야기를 나눌 아내가 있는 것만 해도 어디냐<br/>또 고향마을에 있으니 문을 터놓고 오가는 이웃이 있고<br/>멀리 있는 친구도 가끔 찾아온다<br/>이렇게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만 해도 큰 다행이다<br/> <br/>자리에 일어나 문을 열면 기다리던 아침이 밀려와 문안을 하고 <br/>저녁이면 낙조가 저녁 인사드리고 문을 닫는다<br/>차 한 잔을 마시며 오늘도 하루를 잘 건넜다고 자리에 든다.<br/> - 「하루를 건너며」 전문<br/><br/>하루를 건너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것이고 그 일상은 거창하거나 돋보이지 않아도 ‘저녁이면 낙조가 저녁 인사드리고 문을 닫는’ 풍경이 되는 것이리라. 언젠가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잘 건넜다고 자리에 들’ 수 있지 않을까?<br/><br/><b>여는 시</b><br/><br/>하루가 쉼 없이 지나간다<br/>하루는 물일까<br/>아니면 불일까<br/>물이기에 생명도 주고<br/>불이라서 빛을 주는데<br/>물처럼 흘러가고 <br/>불같이 태워버린다<br/><br/>참 빠르다<br/>전에는 시침이나 분침이었는데<br/>점차 초침이 된다<br/><br/>붙들어 두고 싶지만<br/>어찌 붙들 것인가<br/>붙들지는 못해도 금이라도 하나 긋고 싶어<br/>몇 줄의 시를 종이 위에 얹었는데<br/>바로 긋지 못해 비뚤비뚤한 것 같아 부끄럽다<br/>용기로 받아주시면 너무 고맙겠다 <br/><br/> 2020년 11월 <br/> 행전 글밭에서 박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