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박사의 표정이 점점 험하게 일그러들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짧은 한숨 같은 신음이 그의 노여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너무나 충격이었다.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눈에는 가장 절제된 선택으로 보였다. 단순히 순간의 격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었다. 의도되고 고심하며 깊은 내면의 절절한 미움과 증오를 낱낱이 드러낸 그 편지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고 무례였다.
어떻게 네가 네 아비에게 이런 증오를...... 넌 진정 모르느냐. 아비의 그 깊은 사랑을. 진정 네 우둔은 아닐진대, 어찌 네가 이런 경솔을...... 넌 몰라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 얼마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었는지. 네가 모르는 35의 사랑을 우리는 감히 '35의 신화'라고 칭했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어도 마음속은 진정 그 사랑에 깊이 고개 숙였었다. 그리고 부러워했다. 그런 아비를 가진 너를,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할 줄 아는 네 아비의 가슴을.
어찌 네가 감히 그 아비 앞에서 가족을 말하느냐. 세상의 어느 아비인들 한날 한 시 한순간이라도 제 가족을 잊겠느냐만. 그래도 네 아비는 더욱 남달랐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너를, 너희들을 사라했고, 고달픈 세상살이가 힘겨워 술에라도 취한 날이면 언제나 너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했다. 특별히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다 해도 비굴하지 않은 떳떳함으로 그만하면 부끄럽지 않았고, 호화로운 영화는 아니어도 그만한 성실함이면 술취한 객기에 호통이라도 한번 치련만, 무엇이 그토록 미안하고 안타까웠는지 허구한 날 제 무능만을 자책했다.
--- p.153-154
"그래, 잘났다. 정말 잘났어. 야, 이 얼빠진 친구야. 그런데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 집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 어떤 처지인데, 지금 자네 코앞에 있는 게 무엇인데? ……자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실감이나 하는 거야? 아니, 내가 오진을 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정말 암이, 그것도 친구인 나마저 손을 놓아버리고 이렇게 자네 술벗이 돼줘야 할 정도인 그런 종말의 암이란 걸 믿지 않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남 박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고함치며 흐느낄 듯, 그리고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듯이 그렇게 소리쳤다. 정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봐, 나라면 아니야. 난 절대 그렇게 못해. 자네처럼 그렇게 돌아서서도 욕 한번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자네 처지라면 난 아내에게 모든 걸 말할 거야. 그리고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말, 모든 욕, 모든 원망 다 털어놓고…… 단 얼마간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래야 죽은 뒤에라도 아내가 자책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거 아니야. 나 또한 가슴에 남겨진 것 없이 후련하게 툴툴 털어버리고 허허롭게 사랑하는 마음만 갖고 갈 가고."
---p.78
"그래, 잘났다. 정말 잘났어. 야, 이 얼빠진 친구야. 그런데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 집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 어떤 처지인데, 지금 자네 코앞에 있는 게 무엇인데? ……자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실감이나 하는 거야? 아니, 내가 오진을 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정말 암이, 그것도 친구인 나마저 손을 놓아버리고 이렇게 자네 술벗이 돼줘야 할 정도인 그런 종말의 암이란 걸 믿지 않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남 박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고함치며 흐느낄 듯, 그리고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듯이 그렇게 소리쳤다. 정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봐, 나라면 아니야. 난 절대 그렇게 못해. 자네처럼 그렇게 돌아서서도 욕 한번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자네 처지라면 난 아내에게 모든 걸 말할 거야. 그리고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말, 모든 욕, 모든 원망 다 털어놓고…… 단 얼마간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래야 죽은 뒤에라도 아내가 자책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거 아니야. 나 또한 가슴에 남겨진 것 없이 후련하게 툴툴 털어버리고 허허롭게 사랑하는 마음만 갖고 갈 가고."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