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땅이 있으니, 깃발 꼽고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아파트 올리며 상가도 짓고, 그럴듯하게 가치를 만들어 비싼 가격에 분양하고, 그 마을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다시 깃발 꽂을 땅 찾으러 다니는 짓은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대전여지도1』을 발간할 때부터 줄곧 이야기하는 바는 ‘공간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입니다.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진지하기를 희망합니다.
--- p.7~8, 「여는 글_‘마을’은 ‘삶’을 전제로 합니다」 중에서
“나야 기차 타고 왔지. 강경역에서 기차 타고 원정역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마을에 왔어. 기찻길 옆으로 사람 한 명 바듯이 지나갈 좁은 길이었지. 그때는 이 동네가 참 좋았어. 인심도 좋고 단합도 잘되고 힘들어도 그때가 좋았지. 좋은 어른들 이제 모두 세상 떠나고….”
스물한 살에 강경에서 이곳으로 시집 온 이임덕(82) 할머니가 처음 시집왔을 때, 집은 작은 초가 오두막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터에 집을 짓고 내려왔다. 할머니 집 담장 너머로 새들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합수 지점이라 조금 큰 비가 내리면 물이 넘쳤을 테니, 비옥한 상답이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는 베라별 농사를 다 지었지. 딸기, 참외, 오이 농사. 그렇게 밭에서 나온 거 이고 지고 대전 장에 가서 팔았어. 흑석리하고 두계 장에도 갔고 서대전역이나 대전역 앞으로도 갔지.”
--- p.25~28, 「대전 서구 봉곡동 야실마을_소나무 숲이 마을을 든든하게 지킨다」 중에서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은 예전에 ‘정림’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수밋들이나 갱변, 울바위, 뭐 그렇게 불렀죠. 정림은 이 마을 명칭이었어요.”
원정림에서 만난 주민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갑천의 모습이 불과 50여 년 전에는 전혀 딴판이었다. 갱변(강변)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곳의 대부분은 강변이었다. 별도의 시설 없이 그냥 삽으로 떠 담으면 모래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강 백사장이었다.
원정림에서 만난 주민에 따르면 1960년대 제방을 쌓으면서 굽이굽이 흐르던 갑천 길은 반듯하게 되었고 제방 바깥쪽으로 우성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다. 이 주민은 당시 제방을 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그 결과 생긴 대규모 택지를 불하받은 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 p.31, 「대전 서구 정림동 원정림마을_갑천의 옛 흐름, 고스란히 기억하는 마을」 중에서
정향 선생이 머물렀던 ‘정림장’은 목재와 유리를 이용해 지었다. 지금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툇돌에 파란색 고무신 한 켤레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체구가 큰 정향 선생이 그 고무신을 신고 기둥에 걸어 놓은 지팡이도 챙겨 들고 마당으로 성큼 내려설 것만 같아 한참을 서성였다. 커다란 흰 개가 미친 듯이 짖어 대지만 않았어도 좀 더 상념에 잠길 수 있었을 텐데….
돌아 나오는 길, 아쉬움이 남아 갑천으로 내려섰다. 수량이 많이 줄어 물이 흐르는 하폭은 좁았다. 그래도 왜가리가 날아와 발을 담그고, 강돌을 지나며 돌돌돌 소리를 내는 갑천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석양 질 때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파트와 고층빌딩 솟아오른 도시 한쪽에 옛 모습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숨 쉬고 있는 원정림마을은 콘크리트의 습격에서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p. 41, 「대전 서구 정림동 원정림마을_갑천의 옛 흐름, 고스란히 기억하는 마을」 중에서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많은 흔적을 곳곳에 남겨 둔다.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급하게 걸어가면서 마른 땅 곳곳에 물 자국을 남겨 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 흔적은 추억의 구체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머릿속에만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추억이,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면 행복하다. 봇물 터지듯 저 바닥에 있던 추억이 쏟아져 나오며 기분 좋은 현기증을 일으킨다.
--- p.55, 「대전 서구 정림동 공굴안마을_도솔산 자락에 숨은 도심 속 ‘전원」 중에서
대전광역시 서구 흑석동 물안이마을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지금도 얼떨떨하다. 큰길을 따라가지 않아 더하다. 정림동에서 사진개마을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장태산이 아닌 가수원으로 방향을 잡아 호남선 철도 밑으로 난 조그만 터널을 통과했다. 냇물 위에 옹종맞게 놓여 있는 다리 하나를 건너니 물안이마을이었다. 냇물을 건너며 한가운데서 물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한참을 서 있어도 빨리 가라 재촉하는 이 하나 없다.
마을 이름을 어찌 그리 정했는지는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물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물안이다. 이름 한번 예쁘다. 이를 한자로 ‘내수리’라 부른 적도 있었던 모양인데, 물안이가 훨씬 낫다.
--- p.95, 「대전 서구 흑석동 물안이마을_안산에 기대에 갑천에 스미는 노을을 보다」 중에서
그 집 앞에 안길을 사이에 두고 범상치 않은 향나무 세 그루가 자란다. 마침 대문 밖으로 집주인 이연석(73) 씨가 나온다. 대구에서 시집와 시누리에서 50년을 살았다. 시집올 때는 기차를 타고 흑석역에 내렸다. 보퉁이 하나를 들고 아버지와 함께 걸어 시누리에 왔다.
“저 시집왔을 때도 저 나무는 어지간히 컸어요. 마을에서는 세 형제라고 불렀어요. 세 그루잖아요. 우리 시아버지 어렸을 때 심었다던가, 아마 100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요? 넘었을지도 몰라요.”
--- p.141, 「대전 서구 용촌동 시누리마을_신선 셋이 내려와 낚싯대 드리운 마을」 중에서
이웃한 미리미마을, 갑천 건너 있는 시누리마을과 함께 용촌동을 구성하는 정뱅이마을 경로당 풍경이다. 경로당은 논산 가야곡에서 시집온 권주옥(82) 할머니, 금산군 복수면에서 시집온 백기순(90) 할머니, 대전시 동구 천동에서 시집온 이상순(81) 할머니, 공주시 사곡면에서 시집온 오재월(83) 할머니가 지켰다. 넷이 있기엔 좀 넓은 공간이었다.
“아이고 옛날에가 살기 좋았지. 지금은 예전처럼 재미가 없어. 나 애 낳을 때는 해마다 마을에서 열 명에서 열두 명씩은 아기가 태어났어. 벼 베고 나면 논에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지푸라기 둘둘 말아서 만든 공을 차며 뛰어다녔지. 날 궂은 날 참새 찌꾸르 찌꾸르 하는 것처럼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니는 거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다고. 농사지어서 걷어 들이는 거 보는 것도 재미나고.”
가장 왕언니인 백기순 할머니 얘기에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아이들이 없어 마을이 삭막하단다.
--- p.171,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_고샅 햇살만큼 따뜻한 정뱅이 사람들」 중에서
“내가 시집오고 큰물이 든 것은 한 50년 전인데, 그때는 우리 집 안방까지 물이 차올랐다니까요. 마당까지 물이 들어온 것은 여러 번이고요. 지금도 비가 좀 많이 내리면 겁이 나요.”
문옥남(79) 씨 얘기다. 문옥남 씨 집은 갑천에서 볼 때 맨 앞줄이다.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갑천물이 넘친 건 여러 번인데 제방을 높이면서 좀 나아졌단다. 갑천은 가끔 그렇게 화를 냈지만 아이들에게는 여름 내내 첨벙거리는 수영장이었고 주민에게는 빨래터이자 목욕탕이기도 했다. 김장거리와 푸성귀를 씻는 곳이었으며 갑천에서 아이들이 잡아 온 물고기는 귀한 매운탕 거리였다.
--- p.177~178,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_고샅 햇살만큼 따뜻한 정뱅이 사람들」 중에서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 얘기처럼 눈앞에 펼쳐진 골짜기가 참 깊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끝을 더듬으며 시선을 내밀어 보지만 눈이 부시다. 멀리 기울어 가는 해가 골짜기 끝을 향해 간다. 골짜기 아래쪽에는 집 몇 채가 골목을 사이에 둔 채 모여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개울물 흐르듯 집도 일렬로 나란히 들어섰다. 군데군데 빈집도 여럿이다. 골짜기를 형성하는 산자락에 붙여 집을 지어 길보다 집 마당이 위에 놓였다.
--- p.235~236, 「대전 서구 원정동 노(놋)적골마을_골짜기, 농토와 물줄기를 내어 주다」 중에서
항골은 개발 계획에서 빗겨 갔지만 나정이는 평촌일반산업단지 구역에 들어간다. 이웃한 평촌동 마을과 마찬가지로 산업단지 개발을 반대하거나 적정 보상가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마을 초입부터 집집마다 걸렸다. 마을주민이 갖는 심란함이 마을 전체에 내려앉았다. 보상받을 토지라도 넉넉한 주민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토지주와 건물주가 다른 경우는 막막함이 더하다.
계획상 대부분 일반산업단지로 편입하는 나정이 들은 예로부터 ‘천마지기뜰’이라고 불렀을 만큼 넓다. 경지 정리를 하지 않아 구불구불한 논둑길이 산업시대 이전 마을을 보는 듯 무척 정감 있다. 산업단지에 이렇게 너른 들을 내줘야 하는 현실은 지금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 씁쓸하다. 마지막 농사가 될지도 모를 모내기를 앞두고 정갈하게 써레질을 마무리한 논에 쇠백로 몇 마리가 내려앉아 부리질을 한다.
--- p.267~268, 「대전 서구 매노동 나정이마을과 항골마을_올봄, 마을에 내리쬐는 햇살이 섧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