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개경에서 한양까지 2

개경에서 한양까지 2

: 권력투쟁으로 본 조선 탄생기

리뷰 총점9.0 리뷰 2건 | 판매지수 48
베스트
역사 top100 1주
정가
16,500
판매가
14,850 (10% 할인)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유료 (도서 15,000원 이상 무료) ?
신상품이 출시되면 알려드립니다. 시리즈 알림신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526g | 152*224*30mm
ISBN13 9791156121794
ISBN10 115612179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1388년(우왕 14, 창왕 즉위) 7월,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직후 조준이 상서를 올려 전제개혁을 주장하였다. 회군이 성공하자마자 전제개혁을 들고나왔다는 것은 이성계 등과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제개혁은 조준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조선왕조 개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 p.17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는 개혁 자체보다는 우선 조민수와 같은 기득권 세력을 공격할 구실을 만들었고 그런 쪽으로 먼저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조민수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에 드러내놓고 반대한 자가 없었던 것을 보면 탄핵의 명분은 확실했던 것 같다. 조민수는 그렇게 탄핵을 받아 고향 창녕으로 귀양을 가야 했고 그의 측근 몇몇도 각각 유배에 처해졌다
--- p.24

조준이 토지 분급 대상으로 사대부를 언급한 것은 이들을 중요한 우선 분급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준의 전제개혁이 자신과 같은 사대부들의 경제기반을 우선 마련하겠다는 점을 목표로 설정했다는 뜻이다.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권세가나 기득권자의 탈점한 토지를 몰수하여 사대부의 경제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p.53

제비뽑기로 정창군을 선택한 것도 우습고, 그 선택권을 이성계에게 위탁한 것도 심상치 않다. 새 국왕을 그런 식으로 가볍게 선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창군을 선택한 것도 이성계 측에서는 임시방편적인 국왕으로 치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시 창왕을 폐위시키고 또 한 번 그런 뜻을 품었지만 역시 이루지 못하고 정창군을 세웠던 것이다
--- p.78

공양왕은 여러 반대를 누르고 1390년(공양왕 2) 9월 17일 한양 천도를 실행한다. 여기서 천도라는 것은 국왕이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의미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천도가 아니라 한양에 이궁離宮을 조성한 것이고 여기에 공양왕이 이어한 것이다. …… 그런데 공양왕이 한양으로 이어하기 직전에 공전과 사전의 전적田籍을 저잣거리에서 불사르는 행사를 펼친다. …… 지난 시절의 토지 지배관계를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퍼포먼스 같은 것이었다. 왕조를 지탱했던 구체제의 한 구석이 무너졌다는 신호였다
--- p.119

이성계 측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가장 예민하게 경계했던 자들은 공양왕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닌 바로 군사적 공로를 세운 무장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으며 실질적인 무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 장군을 그런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 p.126쪽),

한번 눈 밖에 벗어난 인물은 끈질기게 추궁하여 끝을 보는 것이 이성계 일파의 권력투쟁 방식이었다. 심덕부가 탄핵 파면당한 직후인 1390년(공양왕 2) 11월 말, 마침내 이성계가 문하시중에 임명된다. 어쩌면 이성계 제거 모의에 심덕부가 연루되었다고 폭로된 사건은 심덕부를 수상에서 밀어내고 이성계 자신이 수상을 차지하려는 음모였는지도 모른다
--- p.129

우왕이나 창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찬탈이기 때문에 이를 도모한 자는 극형이 마땅하지만,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찬탈이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다. 찬탈이 아니려면 이성계는 선양禪讓이나 양위를 받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찬탈인지 선양인지는 정도전 자신이 판단할 문제도 아니고 그가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정도전은 선양만을 머릿속에 두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그는 역사적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새 왕조 개창을 위해서는 정도전과 같은 역사적 확신범 하나쯤 필요했으리라
--- p.149

정몽주를 포섭하지 못하고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성계와 그 세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조선왕조 개창의 한계이면서 선양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 그는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마지막 신하였다. 그런 정몽주의 타살은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 p.202

무장이 아닌 자로 죽임을 당한 자는 정몽주가 유일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성계 측에서 진짜 적대 세력으로 간주한 자들은 군사력을 지닌 무장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인임 정권 이래 지금까지 무장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207

이방원은 이성계 추대에 적극적인 남은과 먼저 계책을 정하고 이를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 등 52인과 추대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였다. …… 고려 시대 관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관원의 총수는 문반과 무반, 이속직이나 품외관, 중앙과 지방의 관리를 모두 합해 5,3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원을 모두 채웠을 경우인데, 이성계의 추대에 적극 참여한 자는 전체 관리의 1퍼센트 정도였다고 보인다. 지방을 제외하고 중앙에 재직하는 문무품관만은 2,200여 명으로 이것만 대상으로 하면 2퍼센트 남짓이다
--- p.213

이성계 측에서 양위가 아닌 폐위를 택한 것은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후계 국왕으로 지명되는 것을 회피한 때문이었다. 그런 양위를 통한 지명이야말로 후대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양왕으로부터 후계 국왕으로 지명받는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의가 아닌 힘에 의한 강요된 양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23

1392년(태조 1) 7월 13일, 공양왕이 폐위된 다음 날 왕대비가 교지를 내려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임시 국정 담당자를 뜻한다. …… 이성계는 그렇게 1392년(태조 1) 7월 17일 왕위에 올랐다. 우왕과 창왕, 두 왕을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하고, 공양왕은 진짜 왕씨라고 자신들이 추대했음에도 다시 폐위하고, 이씨가 고려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58세였다. 이어서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문무관리들에게 예전대로 변함없이 정무를 보게 하고, 이날 자신의 사저로 돌아왔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즉위한 당일 맨 먼저 내린 조치가 이것이다. 문무관리들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고려의 국정을 지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234

8월 13일 이성계는 도당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한다. 바로 이틀 후에는 관리를 한양에 파견하여 궁실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양은 고려 말부터 줄곧 천도 후보지로 올랐었고 우왕이나 공양왕은 한양으로 이어하여 수개월 이상 거처한 적도 있어 대강의 궁실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이를 보수하여 천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양 천도는 공신들이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천도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게 오랫동안 전개되는데, 1395년(태조 4) 10월에야 한양에 여러 궁궐을 조영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일단 마무리했다
--- p.258

1393년(태조 2) 2월 15일, 한상질이 환국한 바로 그날 이성계는 당장 교서를 반포하여 국호를 ‘朝鮮’으로 결정하였다. 교서에서, 지금부터 ‘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朝鮮’의 국호를 쓰겠다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朝鮮’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7개월이 지난 뒤였다. 비로소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뀌는 새 왕조가 열린 것이다
--- p.267

왕조 개창 후 천도 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392년(태조 1) 8월 13일로 이성계가 즉위한 지 한 달쯤 지난 시기였다. 이때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도당에 지시하는데 좀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먼저 나선 사람이 바로 이성계 자신이라는 것, 또 하나는 천도할 곳으로 논의 없이 한양을 꼭 집어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 p.301

1394년(태조 3) 2월 18일, 이성계는 권중화?조준 등 10여 명의 재상들과 서운관의 관리들에게 《비록촬요》를 가지고 가서 무악 남쪽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며칠 후 이들은 무악의 남쪽은 너무 좁아 천도의 땅이 될 수 없다고 이성계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하윤은 개경이나 평양의 궁궐 터에 비해 좁지 않고 중국과 통행하는 데 지리적 이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반박하였다
--- p.308

고려왕조의 문무관료는 이성계가 즉위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도를 결코 반기지 않았다. 천도가 실행되면 이들은 당장 누대에 걸쳐 이룩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니 반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천도 반대 기류는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는 집단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찬성하는 쪽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지배층의 이반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다
--- p.316

이 해 9월 9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의 장관에 임명된 네 사람 외에 정도전?권중화?남은 등이 다시 참여한다. 이성계는 이들을 바로 한양으로 파견하여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이때 권중화가 산맥과 지세의 방향을 살펴서 우선 종묘의 터를 정하고 이에 따른 도면을 그려 바쳤다. …… 재미있는 사실은 이후부터 한양 천도 사업을 정도전이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피할 수 없는 사업이라면 개국공신이 아닌 다른 사람보다 정도전 자신이 나서서 주도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정도전은 이성계에 의해 한양으로 천도지가 확정된 이후에야 천도 사업에 나섰던 것이다
--- p.319

1395년(태조 4) 9월 29일 종묘와 궁궐이 일단 먼저 준공되었다. 실록에는 건물의 규모나 구조, 각 실의 배치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착공한 지 10개월 만으로 엄청나게 서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323

다시 천도 문제가 거론된 것은 이방원이 즉위한 직후였다. 1400년(태종 즉위년) 12월 이방원은 조준?성석린 등에게 일러 다시 천도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바로 이날 수창궁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전소된 것이 계기였다. 중요한 점은 이때 천도 논의를 다시 원점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논의가 아니었다
--- p.328

마침내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이방원에게 전했다. “개경은 왕씨의 구도이니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고 선조의 뜻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천도에 반대가 있고 번거로운 일도 많지만 개경에 그대로 머무를 수 없다는 강경한 뜻이었다. 1404년(태종 4) 9월, 이방원은 더 이상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양의 부족한 궁실을 수습하게 하였다
--- p.332

1405년(태종 5) 10월 8일 국왕 이방원은 개경을 떠나 사흘 후 한양에 당도한다. 돌고 돌아 다시 한양이었다. 새 왕조가 개창된 지 10년도 훨씬 지난 때로 우여곡절을 심하게 겪은 지난한 천도였다. 이후에는 더이상 천도 논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양 천도는 새로운 국호의 제정과 함께 외형적으로 새 왕조 개창의 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337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2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9.0점 9.0 / 10.0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2,5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4,85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