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태론은 동시대 진화론과 유전설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중산계급은 하층사회보다 물질 면이나 정신 면에서 ‘진보’하고 있다는 통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운노의 하층사회에 대한 적대감은 중산계급의 생활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운노는 중산계급의 궁핍을 언급하며 ‘우리나라에서 연수입 300엔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잔혹한 소행’이라고 했고, ‘중류인사에 대한 진흥방안’으로 ‘부담 경감’을 거론했다. 한편 운노는 ‘악질가족(?質家族)’을 구제하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상류, 중류 특히 중류사회’가 떠맡고 있으며 이 부담이 중산계급의 ‘감소’, ‘멸종’을 초래한다고 비난했다. 당시 근대 도시가 형성되면서 슬럼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 결핵, 영아사망, 출생률 감소, 성병 등의 위생학적 문제에 대한 대처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운노는 그러한 문제의 근원적이고 ‘과학’적인 해결방법을 우생학 안에서 찾아내려고 하여 “종족의 생명을 길게 하고 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인류 중 열악자의 희생을 요구”했다.
--- p.108 「제2장_ 우생학과 사회사업」
1935년 12월 7일 협회의 부속 단체인 우생결혼보급회가 발족했다. 나가이 하나에를 회장으로 하는 여성들만의 단체였다. 이 단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예를 들어 12월 8일자 ≪요미우리신문≫에는 “인텔리 여성 1000여 명이 모였다”라고 나와 있다(참고로 학회 발회식에는 800명). 나가이는 1952년 강연에서 발회식에 대해 “구단시타 군인회관의 대강당에서 거행했을 때처럼 발 디딜 틈도 없이 청중으로 가득 차 보조 의자를 꺼내도 자리가 부족했기에, 경관의 주의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늦은 사람들의 입장을 막아야 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협회의 계몽 이벤트는 비상한 관중동원 능력을 자랑했다.
--- pp. 213~214 「제5장_ 1930~1940년대 ≪민족위생≫지의 성립과 변모」
「민족우생보호법」안의 찬성자에 이름을 올렸던 의원의 반수 가까이가 이 취의서의 찬성자에 이름을 올린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 취지는 만주사변 이래 대외 관계가 악화되었음에도 ‘일본 민족의 본바탕을 나날이 피폐시키는 사태’를 우려하고 그 요인으로서 ‘먼저, 입학준비를 위해 어린아이들의 미숙한 심신에 압박을 주는 것’, ‘둘째, 과중한 공부로 인한 일반 학생의 정력 탈진’, ‘셋째, 영양 부족으로 인한 국민 전체의 신체 기능을 쇠퇴’를 들었다. 특히 셋째에 관한 사항으로 각기병의 원인으로 백미식을 들어 현미식을 장려하고, 그것이 어려울 때에는 망고를 하루 걸러 대용하라고 말했다. 아라카와는 참고문헌에 민족위생학회 이사장 나가이 히소무의 ‘민족위생’도 열거했다.12 또한 이 학회의 회지인 ≪민족위생≫에서도 현미식을 강조하고 있다.13 다시 말해서 아라카와는 우생학에 머물지 않고 교육, 위생 전반을 의식한 ‘민족의 소질(素質)’ 개선을 구상하고 있었다.
--- p.274 「제7장_ 「국민우생법」 성립의 재검토」
1939년 6월 10일의 구마모토현·군·시 의사회장 회의에서 전국에 앞서 구마모토현 내의 모든 부인에게 인적 자원 조사를 빠짐없이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7월에 ‘인구증강 기본조사 카드’에 기입시키는 형태로 조사를 개시했다. 조사항목은 ①결혼연령, ②직업, ③형제자매의 수, ④월경, ⑤신생아의 영양방법, ⑥수유기간이었다. 또한 ⑦조사의 목적을 보면 그 목적은 다음 10개 항목이었다. “①다산은 어느 해 그리고 어느 해 결혼한 자에게 많은가, ② 우량아는 어느 해 그리고 어느 해 결혼한 자에게 많은가, ③출산 시 사망은 어느 해 그리고 어느 해 결혼한 자에게 많은가, ④다산은 어느 직업에 많은가, ⑤유산, 조산은 어느 직업에 많은가, ⑥사산은 어느 직업에 많은가, ⑦다산은 형제 자매의 수, 출생순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⑧다산은 월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⑨다산은 수유기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⑩우량아는 수유기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 p.307 「제8장_ 인적 자원 조사에서 「우생보호법」으로」
일모는 「우생보호법」에 의한 인공임신중절과 지정 의사가 생장의 집이나 매스컴으로부터 받는 공격을 오갸 헌금이라는 중증 장애아 복지 증진을 내세우며 매스컴의 주의를 돌리는 정치적 무기로 이용했다. 그래서 자식을 둔 행복한 가정이 지정 의사에게 기여한다는 존재 의의를 선전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도 「우생보호법」 개폐 논의의 재연과 함께 매스컴을 향한 불신감은 흔들림이 없었다. 일모의 매스컴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나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용하려 하든 적시하려 하든, 이 시기의 일모에게 매스컴의 존재는 커다란 압력이었다. 일모는 스스로를 전문가 집단으로 규정하면서도 결국 매스컴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 pp.345~346 「제9장_ 신우생학의 미디어 캠페인」
실제 그 후로도 일모는 태아 조항의 도입을 원했다. 1984년 11월 ≪의보≫ 「양수검사에 관한 설문조사 검사결과」에서 “일본의 인공임신중절의 적응에 태아 조항이 없고, 아무리 태아의 치명적 기형이나 질환이 진단되었다 하더라도 「우생보호법」에 의해서는 인공임신중절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이 있다. 태아진단 기술이 발달해 치명적 기형이나 질환이 확실하고 간단하게 진단된다면, 당연히 그 태아 조항들이 적용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 취지하에 일모 선천이상부(先天異常部)는 회원에게 양수검사, 초음파진단의 실시 현황을 조사했는데, “회원의 약 60%는 양수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증례를 보거나, 초음파 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증상을 발견해서 70% 이상의 회원이 초음파검사를 기형 스크리닝에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5쪽). 1985년은 후생성이 「모자보건법」(1965년 제정)에 임신 전의 모성건강관리를 충실히 하고, 선천이상 모니터링 시스템의 정비를 도모하는 개정을 위해, 곤도 다케후미(近藤健文) 모자위생부장이 8월 22일에 모리야마 유타카 일모 회장을 방문했다( 「모자보건법 개정 운동 활발화 후생성, 내용취지를 공표」, 1쪽). 그러나 이 개정안은 ‘ 「모자보건법」의 개악에 반대하고, 모자보건의 바람직한 자세를 생각하는 전국연락회’의 반대 등에 맞닥뜨려 좌절되고 말았다.
--- pp.409~410 「제10장_ 1970~1980년대 「우생보호법」 개정 논의의 재검토」
산전 진단은 신우생학의 일환이며, 우생사상의 관점에서 전쟁 전 우생학과 연결될 수 있다고 이 책에서 수차례 실증했다. 여성단체와 장애인단체에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까지 적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가 우생사상을 올바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우생학의 악평이 높아지자 1990년대에 「단종법」과 산전 진단을 구분하고, 우생학이 아니라고 발뺌하면서 후자의 존속을 정당화해왔다. 일모에 관해서는, 전쟁 후 얼마 되지 않아 결성한 이래로 단종 수술의 시행을 담당해왔던 과거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생명윤리적 쟁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의료 업무를 담당하던 가운데, 우생학의 계보를 이어 그것이 좋든 싫든 담당했던 과거를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좋다. 그런 반성을 통해 위험성도 내포한 그 기술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지 폭넓게 논의하면 된다. 동시에 ≪의보≫ 이외에 과거 수십 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와 증언을 적극적으로 공개해주기를 바란다.
--- p.429 「종장_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