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한국에서는 국민 가곡이라는 〈선구자〉(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를, 이 책을 준비하면서 처음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고향은 룡정(龍井, 룽징), 〈선구자〉의 무대이고 시인 윤동주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일송정은 학교 다닐 때 봄 야영(소풍) 가는 길에 두어 번 올라가 보았고, 해란강은 어린 시절 유일한 워터파크 삼아 놀던 곳 이다. 점심시간에 시장 음식 맛보러 가면서 룡두레(용두레) 우물가를 지나다녔고, 중학교는 매일같이 룡문교(용문교)를 건너 다녔다. 너무 익숙해서 소중한 줄 몰랐 던 이름들을 뜻밖에 한국의 유명한 노래로 듣자니 지금 도 마음이 설렌다.
--- pp. 7-8, 「책머리에」중에서
아빠의 소식이 끊겼을 때 나는 직장을 항주에서 상해로 옮겨 뒤늦게 대학 국제무역과에 다니며 일과 공부를 동시에 하고 있었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을 마치면 전공을 살려 한국 제품이 인기인 중국에서 작게나마 무역상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나는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우리 가정이 머지않아 다시 모여서 함께 살 꿈을 품고 있었다. 그랬는데 2012년, 8년 넘게 벌어 놓은 돈을 다 가지고 집 산다며 중국으로 건너오신 아버지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더러 “부모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늘상 말씀하시던 아빠였는데.
엄마는 연길로 돌아가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나도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합류했다. 우리는 아빠랑 그동안 통화했던 내용을 단서로 다녀가셨을 만한 곳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
한국행을 결정하고 상해 물건을 부랴부랴 정리하고 엄마랑 한국으로 넘어왔다. 중학교 때부터 십여 년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떨어지는 게 마음 아팠지만 다들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예정도 준비도 없이 9년간의 타지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왔다. 2013년 8월, 내 나이 만 스물아홉 살 때다.
--- pp. 24~26, 「“한국으로”, 쪽
중국 살 때는 중국인이면서도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왔다. 한국에 와 보니, 외국인이면서 한국말을 할 줄 알지만 어중간하다는 불편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은 처음 한국 왔을 때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임금을 떼이기도 했다. 아빠가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여기 와 힘들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상황도 전부 다 힘에 부쳤다. 그래서 한국을 대하는 나의 마음도 닫혀 있었다.
--- p.42, 「“한국 남친”」중에서
드디어 결혼식 날. 신부 입장 차례에, 그 많은 하객들 중에서도 내 친구들만 눈에 확 들어왔다. 예쁜 것도 한몫했지만, 그 많은 하객들 중에서 유독 내 친구들만 엉엉 통곡을 하다시피 울었기 때문이다. 긴장했던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날 정도였다.
“좋은 날 웃어도 모자랄 판에 울긴 왜들 그렇게 울었어?”
결혼식 끝나고 물어보았더니 이구동성으로,
“아버지가 옆에서 함께 걸어 줘야 되는데, 혼자서 걸 어 나오는 걸 보니 안쓰러워서 눈물이 절로 나오더라.”
--- pp. 83~85, 「“아빠 없는 결혼식”」중에서
딸아이를 낳고 100일쯤 지나면서부터 코로나 19 때문에 전 세계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젖먹이 아이와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중국에 있는 친구한테서, 아빠 문제로 경찰이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죄를 지어서 연락이 안 된 거였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아빠가 아닌데….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경찰에 연락을 했다.
참담한 소식이었다. 아빠가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셨다는 연락이었다. 같이 합숙하는 친구분이 신고해서 병원에 실려 갔지만, 끝내 우리한텐 마지막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떠나 버리셨다.
--- p.131, 「“8년 만의 아빠 소식”」중에서
아빠 덕분에 나는 한국에 오게 되었고, 인생의 반쪽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아빠의 손녀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부모 자식은 천륜, 부부는 인륜’이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어떻게든 자식들이 나보다 잘살기 원하는 부모의 염원은 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셔도 자식 곁을 떠돌며 자식을 돕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빠의 염원대로, 나는 더 이상 혼자서 외로움과 싸우지 않고 이 땅에서 인륜을 맺고 또 다른 천륜을 만들고 살아가는 중이다.
--- p.139, 「“아빠의 마지막 선물”」중에서
중국에서는 ‘미군을 내쫓고 조선(북한)을 돕자’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구호를 외쳤고, 인민지원군을 모집했다. 우리 조선족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니 자원이 아닌 강제에 가까운 파견으로 진행이 되었다면서, 할머니는 늘 누구 아들은 그때 죽었고 누구 아버지는 그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해 주셨다. 물론 어린 마음에 전쟁이 뭔지, 가족을 잃어버 린다는 게 어떤 건지 헤아릴 수는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을 하며 한국인들과 접하게 되었고, 6·25 전쟁이 내가 알고 있는 항미원조와 같은 전쟁이란 걸 알았다. 우리 조선족 지원군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서는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셈이다.
--- pp. 160~161, 「“같은 일제 시대, 다른 6·25”」중에서
우리 딸에게는 어쩌면, 평범한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임신하고 이제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니, 장차 태어날 아이의 교육이 걱정되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 보지 못한 내가 모국어가 한국어인 아이한테, 제일 기본이 될 수 있는 한글부터나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걱정보다 적극적으로 맞서는 쪽을 선택했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처음 말과 공부만은 직접 가르쳐야겠어서 내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 pp. 301~302, 「“고마워, 너를 낳고 나를 돌아봐”」중에서
제 아내로서, 딸아이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분야에 도전하는 여자.
결혼 전부터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제약들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는 여자.
부족한 것도 많고 못 하는 것도 많고 게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습관까지 있는 여자, 그러면서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책까지 써 내는 능력과 재주가 있는 여자가 제 마누라입니다.
마누라는 오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당당하게 정직하게 하루하루를 가꾸어 나갑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함께 걸어갈 날이 더 많은 우리에게 어떤 재미난 일이 얼마나 더 많이 일어날지, 인생의 동반자로서 기대를 갖게 하는 여자가 제 마누라입니다.
--- p.325, 「“마누라를 소개하랬더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