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시대구분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독립된 두 나라가 존재했던 당시의 상황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뒤 한국사에의 계승성이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어 나타난 수나라가 북조를 계승한 국가였음에도 남북조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참조한다면, 전자의 기준을 가지고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반면에 삼국통일의 평가와 통일신라 용어 사용과 연계시킨다면 후자의 기준에서 다루어질 문제이다.
--- p.9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南北國時代라고 한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시대’라는 용어보다 간단명료한 표현이다. 아마 우리 시대는 먼 훗날 ‘남북 분단의 시대’ 또는 ‘남북한시대’로 불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1천 년 이상 차이가 나는 두 시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다. 현재는 양자 모두 단일민족 의식을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이와 동일한 의식이 없었다. 그럼에도 상식의 면에서 두 시대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41
앞 단계에서 주로 고구려 계승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당시 통일신라와 대등했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때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였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는 두 갈래 흐름이 나타났으니,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世家, 世紀 등으로 다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종휘의 『東史』가 선구를 이루었으며, 후자의 경우는 유득공의 『발해고』가 그러하였다.
--- p.81
그가 정확한 고증을 위하여 얼마나 고심했나 하는 것은 발해 率賓府의 위치 비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발해고』를 편찬하면서 솔빈부의 위치를 삼수, 갑산 등지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新唐書』에 의하면 솔빈부에서 말이 난다고 하는데, 그 골짜기에서는 말이 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자 내내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산에서 女眞坪을 지나서 있는 端川에서 좋은 말이 나는 것을 알게 되어 비로소 증거를 찾아내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솔빈부의 실제 위치와 괴리가 있지만, 그의 고증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p.104~105
그의 「渤海考序」에서는 유득공의 남경, 동경 비정에 동의하면서 서경의 비정에는 이견을 제시하였는데, 유득공이 “압록부가 강계에서 동북쪽으로 200리 떨어진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내가 압록부 관할에 있던 신주 · 환주 등을 살펴보니 압록강 남쪽에 있었지 강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유득공의 4권본 지리 고증을 비판한 것인데, 사실 이 책에서는 서경의 소재지를 廢四郡과 압록강 북쪽으로 동시에 비정하고 있어 모순이 나타나고, 성해응의 고증에서도 이러한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발해고서」의 주장과 실제 유득공 · 성해응의 고증 내용에 차이가 드러난다.
--- p.130
1960년대 중반 이후 통일신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그간에 간행된 『조선통사』나 『조선전사』를 통해 검토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통일신라사 연구는 발해사 연구에 비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며, 이 부분에서 뚜렷한 성과를 남긴 것마저 한두 가지 주제에 한정되어 있어 발해사 연구와 크게 대조를 이룬다.
--- p.180
사카요리는 鈴木靖民과 함께 발해의 지방사회, 즉 수령제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발해의 지배 아래 있던 말갈 집단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 사회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말갈의 기반 위에 선 발해국을 상정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발해를 말갈로 호칭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시이는 일본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갈국으로 부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p.210
러시아 연구자들이 근거로 삼는 고고 자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발해 유적의 분포 범위이다. 그러나 발해 문화의 분포 범위가 영역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 다른 하나는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발견된 靑銅 魚符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 따라서 니콜라예프카 성터는 발해의 전초 기지였고, 이로부터 동쪽으로는 발해와 적대적인 종족이 살았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생각은 지금도 이어진다.
--- p.268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熱点聚焦(핫이슈)―고구려 문제」에 실린 내용이다. 이 난에는 변경 이론과 함께 중국의 국경 분쟁과 관련된 몽골 서북의 唐努烏梁海(투바) 문제, ‘東突’(동투르키스탄) 문제, 南沙群島 문제, 釣魚島 문제가 나열되어 있는데, 여기에 엉뚱하게 ‘고구려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항들은 현재의 영토 소유권 분쟁인데 유독 고구려라는 역사 문제를 함께 싣고 있는 의도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명백하다.
--- p.287
결국 고구려연구재단이라는 독자적인 연구재단을 설립하였고, 이 무렵에 불거진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북한 유적이 등재되는 결실을 가져왔다. 그 뒤에 연구 결과물을 쏟아냈으나 2년 반 만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동북아역사재단이 2006년 9월에 출범하면서 흡수된 것이다.
--- p.348
이 문구는 발해 國書가 아니라 일본 국서에 해당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발해 스스로 국서에 자신의 위상을 낮추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겠느냐 하는 점이 의문으로 떠오른다. 渤海郡王으로 칭한 사례가 역사서뿐 아니라 고문서에도 나타나므로 후대의 윤색이 아니고, 발해군이나 발해군왕은 발해 측의 표현으로서, 內臣的인 작호인 ‘渤海郡王渤海郡王’을 일찍부터 외교상에서 활용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p.368
이 명문에 許王府라는 관청이 등장한다. 허왕부란 허왕의 관청이니, 이것은 발해 왕 아래 허왕이라는 또 다른 왕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왕 아래 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황상의 단어와 연결되니, 비록 왕이라 불렸지만 발해 왕은 황제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흔히 알고 있는 『신당서』 발해전의 구절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宣詔省이나 詔誥舍人에 ‘詔’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명령인 敎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인 詔로 불렸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