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여행의 경험을 담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기행문이 조선총독부의 정책 선전 기획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학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의뢰를 받아 연재한 「오도답파여행」에서 이광수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을 기관장과 문답하는 방식 또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통해 서술했다. 「오도답파여행」은 1917년 6월 29일부터 같은 해 9월 12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총 53회로 완료된 이 연재물은 『매일신보』만이 아니라 이 신문이 속해 있던 『경성일보』에도 게재되었다. 춘원은 첫 도착지인 공주에서 「오도답파여행」의 첫 회분 원고를 작성해 6월 29일 자 『매일신보』 1면에 게재했다. 이후 목포에서 이질(痢疾)에 걸려 입원하면서 연재를 잠시 중단하지만, 치료를 마치자 다시 여행을 계속해 남해 일대와 부산, 대구를 거쳐 경주를 시찰했다. 8월 18일 경주에서 마지막 원고를 탈고했으나 앞서 순연된 기사들 때문에 마지막 회는 9월 12일 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 「머리말」 중에서
「오도답파여행」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광수의 문명론은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담론이다. 우리가 애써 그의 문명론을 부정하려는 이유는 그의 친일 전력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일제의 식민지 경험을 지우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이 더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식민지의 기억을 지우려고 할수록 식민지 유산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부상할 수밖에 없다. 식민의 기억은 지우고 싶은 치욕의 역사이지만, 백여 년 동안 우리가 성취한 근대화의 연원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백 년 전 이광수의 여정을 따라가는 나의 여행은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불편한 여행이다. 또한 식민지 유산을 바라보는 두 시선, ‘수탈’과 ‘근대화’의 양면성을 동시에 관찰해야 하는 여행이기도 하다.
--- 「머리말」 중에서
선조의 유산을 부정하는 춘원의 지향점을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일진회(一進會)의 후원을 받아 첫 유학을 떠날 때부터 전대의 유산을 부정했던 춘원은 두 차례의 유학 생활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은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조선인 앞에서는 자신을 스스로 스승으로 격상했던 그였지만, 일본인 스승 앞에서는 조선의 문학청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문학적 성취를 이룬 외국의 스승이 문학의 길에 들어선 제자에게 훈수를 두는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다. 외부 명망가의 입을 빌려 내부의 문제를 진단하는 춘원의 모습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빈곤함과 부박함이 느껴진다.
--- 「충청남도」 중에서
춘원은 부소산 일대의 흔적만 남은 백제의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화염에 휩싸였을 백제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애달파한다. 상상으로 천 년 전 백제를 거닐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눈을 뜨면 ‘거친 풀로 덮인 반월 성지의 황량’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질 뿐이다. 그는 부소산만을 백제인의 옛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북동쪽에서 유유히 흘러내려 부소산을 활처럼돌아 가는 백마강이 있기에 백제의 문화도 빛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공주를 지나 부여로 들어온 금강의 푸른 물줄기와 흰 모래밭, 낮은 산등성들이 고운 눈썹을 그리며 청양(靑陽)으로 이어지는 풍광에 감탄하면서 부여는 백제인의 땅이라고 강조한다. 이곳의 주인 자리를 빼앗긴 ‘문아(文雅)한 백제인’이 이제 부여로 돌아와 신문명의 꽃을 피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에 그의 바람은 곧 고려와 조선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 「충청남도」 중에서
춘원은 수리조합을 ‘문명적 신사업 신시설’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수리조합의 설립 주체가 대지주였고, 미곡 생산량이 늘더라도 소작인에게 혜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당시 수리조합의 물을 받는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들은 수리조합의 물 사용료, 비료 값 등등 부대 비용을 포함해 수확량의 육 할 이상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내고 있었다. 각종 비용이 소작농에게 전가되면서 소작쟁의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소작쟁의를 일으킨 소작농들의 요구사항 중에 수리조합비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았던 것을 보면 수리조합이 쌀 수확량을 늘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소작인들에게는 수탈기구였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춘원은 수리조합의 경영 주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조선인도 문명화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 「전라북도」 중에서
사회진화론을 신봉했던 그에게 직업교육과 산업발전은 문명 조선을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전주와 순천(順天)을 잇는 경편철도(輕便鐵道)의 부설을 희망하고, 용기 있는 대기업가의 배출을 ‘대한(大旱)의 운예(雲霓) 같이’ 바라는 그는 궁극적으로 산업부국(産業富國)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 그는 대규모 산업과 대량생산의 현실을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초래할 지역 산업의 붕괴, 전통 산업의 몰락을 예측하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근대적 산업과 생산의 주체가 지배자 일본인이었고, 전통 방식의 생산 주체가 몰락하고, 그 주체가 바로 피지배자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뚜렷한 의식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약한 동포를 긍휼히 여기는 동정(同情)을 자신의 문학적 원천으로 삼았고, 지식인의 자발적 실천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러나 약육강식 시대의 식산흥업은 강자를 위한 수사(修辭)일 뿐이었다. 춘원의 식산흥업론은 조선의 발전을 바라는 강박의 산물이었다. ‘준비론’을 신봉했던 그는 자신의 논리가 일제의 식민화 논리와 같은 축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식산흥업론은 대한제국 시기 등장해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다양하게 변주된 근대화론이다. 서구의 산업혁명을 우리가 따라가야 할 전범으로 삼을 때부터 이 명제는 국가발전을 위한 당위론이자,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춘원은 식산흥업론에 내재한 부정적인 측면은 간과했다. 오히려 그는 「오도답파여행」 곳곳에서 산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식민지 조선이 발전할 수 있다는 당위성만을 반복적으로 나열했다.
--- 「전라북도」 중에서
춘원은 이곳 조선인들이 광주를 전주와 비교하면서도 도시 발전의 바탕이 되는 교육 투자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 인구가 이십만이나 되는 광주군(광주면을 포함한 41개 면)에 학교는 턱없이 부족하고, 광주 지역 인사들의 활동이 부족한 탓인지 각종 단체 등의 설립도 부진하다고 비판한다. 그가 광주 인사의 분발을 독려한 이유는 이곳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각종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고 있고, 일본인 거주 지역의 발전과 단합을 위한 기부금 출연에 적극적인 반면에 조선인은 단체의 설립은 전무하고 공익사업을 위한 투자도 권유에 못 이겨 겨우 내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전화, 전등, 수도 등의 가설사업은 수익자가 건설비용을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춘원은 이들 사업을 공익사업으로 보았고, 조선인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려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전라남도」 중에서
「오도답파여행」에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지만 쓰지 못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그는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잊으려 했다. 그렇지만 잊으려 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그의 기분을 우울하게 한다. ‘청한(靑閒)함을 주었던 온천욕’도 사치라 생각한다. 탐량단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하는 그는 구슬피 우는 벌레 소리에도 조선인의 비루(鄙陋)한 삶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그래도 온천욕은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그를 편안하게 해주었나 보다. 친구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해운대로 향하면서 동래온천 일대를 둘러볼 정도로 춘원은 이곳을 편하게 여긴다. 여행에 지친 그에게 동래온천은 안위(安慰)의 장소였던 셈이다. 동래에서 춘원은 아베 미츠이에, 『매일신보』 기자인 방태영(方台榮)과 함께 동래 군청을 찾아 임진왜란 때 벌어졌던 동래성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고,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그의 첩이었던 김섬(金蟾)의 추모비를 돌아본다. 이때 아베 미츠이에는 김섬의 추모비에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하며 그녀의 절개를 칭송한다. 그에 비해 방태영은 반일적인 화제가 등장하자 자리가 불편했는지 “아이구 몸이 치르르하네.”라면서 자리를 피한다. 이 장면은 1917년 『매일신보』라는 매체의 정치적 환경을 보여준다. 지한파 일본인, 친일파 조선인, 반일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춘원 같은 조선인 민족주의자가 공존하고 있는 환경을 보여준다. 후일 춘원은 『반도강산』으로 재출간하면서 이 장면을 삭제했다.
--- 「경상남도」 중에서
대구 여행기는 문명과 야만의 비교로 시작한다. 일제에 의해 도입된 통신, 전화, 도로, 마차, 상수도, 하수도, 병원, 은행, 금융조합 등은 문명의 본보기로 제시하고, 쓰러져 가는 초가집, 파리가 날아드는 음식점, 불결한 도로 등은 야만의 결과물로 거론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구
의 조선인들(舊大邱의 人民)은 문명화를 추진하려는 능력을 갖추려는 의지가 없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대구 사람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 년 전, 춘원은 「대구에서」라는 논설에서 ‘대구의 청년들을 지식이 암매한 자’로 규정했고, 그들이 ‘옛날 생각(引舊夢)만 하고있다’고 비난했었다. 일 년 후 다시 찾은 대구에서 그는 비판의 강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 「경상북도」 중에서
일 년 전, 그는 대구에서 발생한 조선 청년들의 강도 사건을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고 와서도 관리가 될 수 없는 자들이 불만을 품고 저지른 소행’으로 규정했었다. 그는 다시 대구를 찾은 자리에서 ‘청년들이 실업계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의 말처럼 ‘일본인의 손에 전반 사회의 주권이 들어간’ 상황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상공업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매판(買辦)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대구 청년들에게 실업의 중심이 되라는 그의 말은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게다가 ‘일제의 지배 이후 문물이 발달했음에도 조선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이유를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 때문이라고 탓하는 상황에 이르면 그가 식민지 조선의 다섯 개 도를 여행하면서 본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간간이 지면에 쓸 수 없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슬픔의 정조로 드러냈었던 그였지만 대구에서는 훈계만 늘어놓았다.
--- 「경상북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