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급기야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내 목소리가 아파트 유리벽을 흔들리게 할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잦아들자 이내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바깥을 내다보니 언제 사라졌는지 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겨울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듯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가운데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나는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살펴보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캐리의 실내화 한 짝을 발견했다. 연분홍색 벨벳 실내화로 이상하게 왼발에 신는 한 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나머지 한 짝을 부지런히 찾아보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큰 충격에 휩싸인 나는 경찰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 p.24~25
캐리가 실종되기 전까지 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내가 쓴 책을 단 한 줄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까지 나서서 내 소설에 나오는 암호 같은 문장들을 퍼 나르며 억지에 가까운 가설의 탑을 쌓아올렸다.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상털이 표적이 되었고, 하이에나 같은 네티즌들로부터 가차 없이 난도질을 당했다. 언론의 무차별한 의혹 제기와 팩트 체크도 하지 않은 악의적인 기사, 네티즌들이 유포하는 아니면 말고 식 가설들은 판사가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가혹했다. 다양한 의혹들이 아무런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실로 둔갑해 널리 퍼져나갔다. 언론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로지 판매 부수와 인터넷판 조회 수를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몇몇 언론사들은 클릭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선정적인 이미지를 동원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기사들을 거침없이 내보내기도 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캐리의 실종이 사이비 저널리스트들에게는 그저 기분 전환용 오락거리이자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 p.41
나는 팡틴이 두고 간 던힐 나미키 만년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펜을 요술 방망이와 다름없다고 믿어왔다. 순진한 척 해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어왔다. 내가 글을 쓸 때 어휘들은 레고 블록 같은 역할을 했다. 나는 끈기 있게 어휘들을 조합해가며 내가 머릿속으로 그린 세계를 쌓아올렸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만큼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한 세계의 여왕이 되었다. 나에게 모든 등장인물들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고, 나름 지혜롭고 현명한 인물들에게는 무한한 은총을 베풀었다.
내 가치관과 윤리관이 인물들의 됨됨이를 정하면 그뿐이었고, 굳이 내 판단이 정당했다고 증명할 필요성이 없었다. 지금껏 세 권의 소설을 썼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네댓 권의 소설이 더 들어 있었다. 나는 픽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과 현실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엇비슷했다. 캐리가 실종되면서 이제 픽션 세계는 나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내 요술 방망이는 딸아이의 실종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고통스러운 현실이 주도권을 쥐고 나의 무조건적 도피 시도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 p.62
애써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명백한 진실이 저절로 드러났다. 나는 방금 어느 작가가 쓴 소설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동타자기, 아니 컴퓨터라고 해야 훨씬 현실성이 있겠지만 아무튼 누군가가 나를 매단 줄을 잡고 제멋대로 조종하는 중이었다. 나는 비로소 나의 적이 누군지 알아냈다. 내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의 교활한 술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직업을 가진 소설가이니까.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방금 전 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나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계속 인형을 매단 줄을 제멋대로 흐트러뜨려 놓고 있었다. 방금 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 열렸다. 이야기의 결말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 이제 나는 그의 책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야만 했다.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그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그를 픽션 세계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p.92
내가 소설을 쓸 때 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정밀한 작업을 요하는 시계공처럼 우선 몇 달에 걸쳐 완벽에 가까운 집필 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자료 준비를 했다. 내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수첩에 사건, 발단, 전개, 위기, 반전,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외모, 성격, 특징, 소설의 배경으로 정한 도시의 관련 자료, 사건이나 등장인물에 따른 전문 지식을 적어두었다. 글을 쓰다가 막힐 경우 수첩을 꺼내 준비해둔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장 지오노(Jean Giono 프랑스의 소설가 : 옮긴이)도 글쓰기에 착수하기에 앞서 사전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제 책은 거의 완성되었다. 쓰기만 하면 되니까.’ 해가 여러 번 바뀌고 내가 쓴 소설이 많아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러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 작업 방식에 변화를 줄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전에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를 미리 정해둘 경우 의외성이 줄어들어 박진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요즘은 작가인 나도 어떤 결론을 내릴지 미리 정해두지 않은 가운데 내 자신을 소설 속으로 던져 넣는 집필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스티븐 킹이 즐겨 채택한 집필 방식이었다.
--- p.100~101
알민은 6개월 전부터 내 휴대폰을 몰래 가져가 악의적인 문자메시지를 스스로 작성한 다음 자기 휴대폰에 보내두었다. 어이없게도 문자메시지들 중에는 내가 알민은 물론 아들인 테오를 비방하고 협박하는 내용도 다수 들어 있었다. ‘머저리 같은 년’, ‘화냥년’, ‘갈보’, ‘난 절대로 이혼해주지 않을 거야.’, ‘언젠가 너랑 테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야.’, ‘널 죽여 버리고, 시체랑 씹할 테니 두고 봐.’ 이혼 소송 과정에서 알민의 변호사들이 언론에 널리 유포한 가짜 문자메시지들은 대개 그런 수준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아무 데나 두고 다녔고, 10년째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알민이 내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스스로 작성해 보내는 동안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매사에 용의주도한 알민이 그 천박한 문자메시지들을 보내고 나서 즉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알민은 스스로 작성한 문자메시지를 언론에 유포했고,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지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알민은 문자메시지뿐만 아니라 악마의 편집을 동원한 동영상도 유포시켰다. 그 동영상이 내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민이 셀프 제작해 유포한 30초짜리 동영상은 한때 유튜브에도 올라와 수많은 억측과 구설수를 낳았다. 알민은 휴대폰을 해킹당하는 바람에 동영상이 유출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나를 망신주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직접 유포시킨 게 분명했다.
--- p.103~104
“당신이 환경 문제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건 알지만 도대체 테오를 생태 오두막에 데려가서 뭘 어쩌자는 거야? 거긴 교육시스템이 나 의료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야. 테오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해.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돼.” “그깟 교육은 안 받아도 상관없어. 난 환경 재난이 밀어닥쳐도 테오가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줄 거야. 도시의 삶은 위험해. 도시는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테러, 인종 문제,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어. 나는 한순간에 밀어닥칠 수도 있는 재앙으로부터 테오를 지키려는 거야.”
그것으로 우리의 협상은 끝났고, 나는 패배했다. 우리는 어느새 파리 리옹 역에 도착했다. 높은 탑의 사면을 장식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역의 망루가 루이 아르망 광장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지막 호소를 해볼 요량으로 알민에게 다시 한번 내 진심을 고백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테오는 나의 전부야. 당신이 테오를 데리고 떠나면 난 아마 죽을지도 몰라.”
---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