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신문기사, 티브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를 접할 때마다 늘 마음이 무겁고 서글픈 감정이 들었습니다. 전쟁이 한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틈틈이 자료를 모았고 한 번은 꼭 이 문제를 장편동화로 써야지,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비행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날 내가 알게 된 강점기 소년비행병은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단순한 의미의 ‘가미카제특공대’이자 ‘자살특공대원’이 아니었던 겁니다.
비행기로 자살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전쟁 주축국인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운 자들이 아니었던 거예요. 물론 경위야 어찌됐든 스스로 지원서를 쓰고 비행병으로 간 조선 소년들이었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 측에서 보면 그들은 ‘친일파’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원서를 쓰고 비행병으로 가 산화된 배후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더군요.
그들이 지원할 때만 해도 우리 조선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일본사람들조차 그들이 자살공격대원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일본군 집행부가 철저히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우리 조선의 우수한 소년들이 지원병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가난과 협박과 빚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가 도사리고 있어서, 어린 소년들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가족을 위한 희생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소년비행병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찬성과 반대로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얼마 전부터는 올바르게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쟁보다 무서운 게 있을까요. 강점기에 억울하게, 참담하게 스러져 간 우리 조선의 소년, 소녀들에게 따뜻한 눈물 한 줄 바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글귀를 되새겨 봅니다. 이 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우리의 미래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
“그래, 그렇지. 넌 내게 형과 누나가 한 분씩 있었다는 건 알지?”
솔이 아빠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두 분 다 해방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로…….”
증조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 떨어져 앉았던 솔이와 강이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앉았다. 솔이 엄마도 상체를 기울여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낡은 대나무 모형비행기 하나와 빛바랜 치마저고리 한 벌이 들어있었다. 솔이와 강이가 몹시 실망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강이는 어느새 아랫입술이 쑤욱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솔이 엄마가 잠자코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증조할아버지가 모형비행기를 집어 들었다.
“이 비행기는 내 형님이 만들어 가지고 놀던 거였다.”
이번에는 치마저고리를 두 손에 받쳐 들었다.
“이건 내 누님이 입었던 옷이고 말이다.”
솔이 아빠가 물건들을 차례로 만져봤다.
“오랫동안 간직하셨네요.”
종이상자 안에 두 물건을 다시 잘 집어넣고 난 증조할아버지가 솔이 아빠 눈을 잠깐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러더니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형님은 정말 해방 얼마 전 돌아가셨어. 하지만 누님은 아직 살아계신다. 우리 이 대한민국에!”
“예?”
충격을 받은 솔이 아빠가 솔이 엄마를 돌아봤다. 솔이 엄마도 너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증조할아버지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지 침을 여러 번 발랐다.
“우리 삼 남매는 이름에‘은’ 자를 돌림자로 썼어. 내가 강은이잖니. 그러니 먼저 가신 내 형님은 이름이 종은이었고 나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내 누님은 명은이고 다섯 살이 많아.”
--- p.28~3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중에서
그때 교장실 문이 열리면서 종은의 담임교사가 들어왔다. 그는 조선 사람이었다.
“저희 반 아이가 여기로 들어갔단 말을 듣고…….”
담임은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듯 더 이상 말없이 종은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놓인‘육군소년 비행병 모집’전단을 보고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챘다. 담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대금업자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제가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여기 온 것이 결코 이 신성한 학교에서 빚 독촉을 하거나 빚을 받으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날마다 힘들게 빚에 쪼들리거나 독촉을 받지 않고, 이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면서도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뿐이라는 겁니다.”
대금업자는 교장과 교련 교사와 담임을 차례로 돌아봤다.
그러고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더구나 이 일은 애국하는 일이다, 저는 이 말씀을 꼭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교장도 교련 교사도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대꾸가 없었다.
--- p.50~52, 「비행기 조종사의 꿈」 중에서
“그런데 얼마나 아이를 다그쳤는지 아이가 사람을 봐도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안 하더라고요. 그냥 입을 꼭 다물고 그렇게 찍소리 한 번 못 내고 끌려가더라니까요.”
할머니가 방바닥으로 쓰러지며 흐느꼈다.
“아이고, 아이고오~! 나는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리 명은이를 찾으러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는데, 새댁 말을 듣고 보니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 돼버린 거 같구먼. 이젠 애를 찾겠다는 희망조차 없어져 버렸어. 아이고, 불쌍한 것…….”
그들이 자동차로 명은을 데리고 갔다면 명은을 찾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까지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인간사냥꾼’에게 잡혀간 게 틀림없었다. 명은은 이미 다른 나라로 가는 배에 태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p.100, 「희망조차 사라지고」 중에서
그날 형님은 우리한테 말을 안 했지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거 같아. 우리와 얼굴을 마주하자 참 많이 울었거든. 마치 이 생에서는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슬프게도 울더군.
형님이 내 두 손을 힘주어 잡고 그랬어.
“너는 절대 군인으로 가지 마라!”
글쎄, 그걸 몇 번이나 나한테 다짐받으려고 하더라니까. 그러고는 할머니한테도 그런 말을 했어.
“할머니, 우리 막내는 꼭 지켜 주세요. 명은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돌아오지 않을 걸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할머니께서는 반드시 강은이만큼은 군인으로 보내지 말고 잘 지켜내세요.”
“오냐, 내가 꼭 네 말대로 하마!”
할머니한테까지 그 대답을 듣고서야 더 이상 그 말을 안 하더라고.
--- p.105, 「소년비행병의 운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