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그들은 질문한다. ‘스무 겹의 두터운 매트리스와 스무 겹의 두터운 오리털 이불 너머 내가, 당신이, 우리가 감촉하고 있는 완두콩은 무엇인가요?’ 하고. 그러니 감히 소망한다. 다큐멘터리를 꿈꾸는 당신, 스무 겹의 매트리스와 스무 겹의 오리털 이불 위에서라도 당신은 늘 창창하게 깨어 있기를. 그 아래 감추어져 있는 완두콩이 부디 오래오래 당신이 잠들지 못하게 하기를. 그 긴긴밤, 당신들에게 이 책이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더한 기쁨이 없겠다.
--- p.9
그러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은 무엇보다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현상을 바라보고, 현상의 이면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하며, 현상의 이면에서 문제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큐멘터리스트는 모든 곳에서 질문을 찾아낸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일상의 회의주의자다. 의심하고 질문할 수 있을 때, 공고한 현실의 균열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p.47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심연과 같다.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존재,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비루하고 한편으로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존재. 어쩌면 인간이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인간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 카메라가 그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남들이 보지 못한 어떤 것, 자신이 해석해낼 수 있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의 ‘어떤 것’을 보여줄 뿐이다. 커다란 성취를 이루어낸 인물의 이면에서 고독과 허무를 읽어내기도 하고, 평범한 생활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삶에 대한 경이와 사랑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의 대상으로서의 인물은 유명인이건 보통 사람이건, 모두 특별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거기서 비롯된 특별한 발견이 그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p.147~148
대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래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된다. 나는 왜 이 대상에게 끌리는가? 이 대상에게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 보이는 어떤 지점들, 나에게 와닿아 어떤 감정의 증폭을 일으키는 그 지점들이 보다 명료해지는 과정이야말로 끌림이 ‘형상화’되는 과정이다. 그것을 타자와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다큐멘터리 기획이 시작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끌림이 ‘사회화’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획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 p.161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은 현장의 경험자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이고, 다큐멘터리 서사는 사건 자체를 드러내는가 하면 동시에 사건에 대한 반응과 해석을 더 주요하게 다룬다. 다큐멘터리란 장르 자체가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독특한 장인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태도 자체도 마찬가지다. 이 장르가 화면에 드러내려는 것은 실제 인물의 실제적인 삶이기 때문에 카메라가 그의 삶에 끼칠 영향에 대해 윤리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현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가변적인 상황들을 어떻게 스크린 위의 영상 서사 맥락 속에 위치 지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한다. ‘관계 맺기’와 ‘거리 두기’가 동시에 가능해야 하는 작업이다.
--- p.201
다큐멘터리는 확정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변화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그 변화 속에서 감독의 시선도 성장해가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실로 성장할 수 있다.
--- p.289
결론적으로, 관객들과 소통하고, 관객들에게 우리 현실에서 가려져 있던 무엇, 의미 있는 무엇을 일깨우고, 관객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며, 관객들이 어떤 측면에서건 감동받는 작품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무엇으로 불리든 좋은 다큐멘터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는 예술적으로도 좋은 다큐멘터리일 가능성이 높고, 좋은 예술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의 측면으로도 좋은 다큐멘터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 p.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