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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파란시선-0074이동
신은숙 | 파란 | 2020년 12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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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19쪽 | 188g | 128*208*20mm
ISBN13 9791187756873
ISBN10 1187756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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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약일 수 있을까,

문득 작약이 눈앞에서 환하게 피다니
거짓말같이 환호작약하다니

직박구리 한 마리 날아간 허공이
일파만파 물결 일 듯
브로치 같은 작약 아니
작약 닮은 앙다문 브로치 하나
작작 야곰야곰 피다니

팔랑,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작약은 귀를 접는다
그리운 이름일랑 죄다 모아
저 귓속에 넣으면
세상의 발자국도 점점 멀어져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

산사에 바람이 불어
어떤 바람도 남지 않듯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중에서

살아진다는 말은 사라진다는 말

너 없이 살아진다고 썼는데 사라지는 나를 보았다
그때 나의 무게는 고작 21그램
돌아갈 별이 있다는 것은 돌고 도는 우주의 셈법
사라진다는 말은 살아진다는 말의 입버릇

노을이 사라지는 발코니에 매달려
소멸이 왜 아름다운지
개와 늑대의 시간엔 한 번쯤 짐승으로 돌아가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울음만으로 완벽한 득음의 귀였다가

너 없이 살아질 동안
사라지는 나는 너의 다른 얼굴

견딘다는 말은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난 이유
아직은 바라볼 별빛이 있다는 말

자꾸 태어나는 마트료시카들
---「사라짐에 대하여」중에서

눈 내린 사북 거리

미용사는 일찍이 은하로 떠났는지
흰 슬레이트 검은 페인트 간판 하나
허공을 붙잡고 있다
사북 거리는 온통 간판만 운행 중이다
시몬이발소도 시몬이 떠난 지 오래다

빠마 고데 신부화장
벗겨진 선팅지 너머
꼬불거리고 빛나는 머릿결 쓸어 올린
눈 같은 신부가 앉아 있다
푸른 눈두덩 새빨간 입술
안개꽃 드레스 입고 웃고 있다

신부는 아직 사북에 남았을까
탄가루 날리는 봄
멀리 우는 함백역
기적 따라 떠났을까

미용실도 헤어숍도 아닌 미장원
가위 소리 사라졌어도
검고 흰 기억들만 교차하는
사북 거리

나도 한때 푸른 은하였다
---「은하미장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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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곳곳이 생의 된비알이다. 오르기에 버겁지 않은 것은 재물, 애욕 따위의 기울기를 신은숙이 지워 준 까닭이다. 비탈이 평지가 된 것이다. 시인은 동음이의(同音異義) 세계를 넘나들며 통념을 바루고 비탄을 달게 본다. 젖은 종이 같은 이미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버리고 홍조(鴻爪)와도 같은 존재들을 사늘하게 표현해 냈다. 자기 연민을 은유한 이미지들을 자전적 상처라며 도금해서 팔아먹지 않는다. 폴라로이드처럼 단 하나의 컷으로 채집해 내는, 후보정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 결벽을 견지한다. 명랑한 것 같지만 감정 제어가 섬세해서 조울로 널을 뛰거나 참혹으로 추락하지도 않는다.

신은숙의 시편들을 일독하면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된다. 결리는 곳이 없고 쓰라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정의 편향이 없는 것이 시의 정석이다. 매혹은 극(極)에서 분화(噴火)하는 것임에도 거기까지 이르지 않고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매력이 충분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력을 가진다. 사랑했고 미워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부분이겠거니와 언어조차 서로 친밀해지고 때로는 반발하게 마련인데 그 인력과 척력을 다룰 줄 알아서 문장 안에서 결합시키고 행을 가르며 대비해 놓은 것이다. 편편마다 일어나는 정서적 환기 때문에 적바림을 멈출 수 없는 시집이다. 고향을 한 정거장 앞둔 딸처럼 가만가만 손을 잡아 보게 되는 감정의 회목이다. 문자로서는 일현금(一絃琴)인데 천 갈래 만 갈래로 휘어지고 공명하는 진술들의 축음기다.
- 전영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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