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건축의 근원이며 생명 근원의 통로조선 후기(영조27)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복거총론(卜居總論)에 당시 조선사회의 마을과 거주지의 이상적인 조건으로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를 제시하고 있다. 땅은 흙이다. 흙 속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흙냄새가 난다. 한국의 점토는 물이 스며들어도 중국이나 일본의 흙에 비해 부피가 별로 팽창하지 않는다. 달 표면의 흙에는 암석가루뿐인데, 지구의 표면인 흙에는 물과 공기와 유기물과 암석가루인 흙 알갱이가 합쳐서 있다. 보통생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증식할 수 있는 데 비해 무생물은 그럴 능력이 없다. 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도 증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무생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미생물들이 살고 있기에 흙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엄격히 말해 흙은 생명 근원의 통로이고 건축의 근원이다.
--- p.3, 「땅」 중에서
서양의 현대건축에는 건축물을 일부러 찌그러진 모습으로 만드는 해체주의 양식 사조가 있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프레드 앤 진저 빌딩’은 건물을 받치는 기둥뿐만 아니라 건물 자체도심하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개심사 범종각과 유사하다. 해체주의는 정형적 질서를 강요하는 기존의 건축 경향을 현실성 없는 가식의 세계라 비판하는 일종의 반문명 양식 운동이다. 기존의 건축 양식들은 수천 년간 안정되고 질서 있는 조형 세계를 추구해 왔다.
그런데도 현실 세계는 늘 폭력과 거짓이 난무하다. 해체주의는 직선·직각·사각형 등으로 구성되는 기존 건축세계의 안정과 질서를 비현실적인 위선이라 여기며 거부하고, 이러한 위선을 해체하고자 하는 비정형적이고 무질서한 건축 세계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두 건축물 모두 정형적인 규범에 반하여 비정형적 건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해체주의 양식은 인간의 현실 세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해체라는 부정적 조형관으로 제시한다. 부정을 부정으로 풀려는 서양의 해체주의 건축은 현실 세계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인간의 손으로 찾으려는 서양 문명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에 반해 범종각의 조형관은 부정적 현실 세계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 속 완결된 하나의 생명 단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적 조형관을 제시한다. 부정을 긍정으로 풀려는 현실문제의 해결책을 자연 속에서 찾으려는 한국적 사상에서 기인한다.
갈라지고 터지고 옹이가 있는 나무의 결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노인의 주름과 검게 그을린 피부를 보고 있는 듯하다. 단청이나 주색 칠을 입히지 않은 나무결은 우아한 중년여인의 민얼굴처럼 보인다. 나무는 무생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생명체의 피부와도 같다. 아직도 뿌리에서 물을 흡수하여 올리는 것 같고, 몸통에서 유기 작용이 일어나 신진대사를 하는 듯하다. 나무의 외피만 벗겨내고 가공하지 않은 도랑주는 나무가 성장해 온 환경상태를 그대로 담고 있어 마치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모습 같다.
--- p.64, 「해체주의」 중에서
형태주의란, 재미있고 독특한 형태로 건물의 조형성을 결정하는 양식 사조로 서양 현대건축에서 부드러운 지붕 곡선을 추구하는 경향이 하나의 큰 흐름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처마 곡선은 사전 계산 없이 현자에서 장인의 눈썰미로 결정되지만, 서양의 지붕은 사전에 행한 정밀한 구조 계산을 바탕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한 대로 주조됨으로써 합리적 과학 기술의 결과물을 창출한다. 현대사회는 전 세계가 표준화되고 초 단위로 문명이 발전하고 있다. 합리적이고 정확한 계량적 사고가 기본적인 의무이고 품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기성품이나 로봇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서양식 합리주의 문화와 우리의 재래문화는 이분법적 우열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두 문화가 서로 보완하면서 더 큰 제3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팔작지붕의 처마 곡선과 서양 현대건축의 곡선 지붕으로부터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 p.84, 「형태주의 곡선」 중에서
누마루는 형태상으로 고상식이고, 기능적으로는 여름에 습기를 피하면서 조망·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대청마루가 대개 한 면이나 두 면이 개방된 데 비해 누마루는 세 면이 개방되어 외부의 수려한 풍광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 된다. 외부에서 보이는 지붕 선은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지붕에 크기가 다른 합각 부분이 전후좌우에 중첩되어 있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누마루는 안에서 밖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햇빛, 달빛, 바람도 함께 머무는 장소이다. 더구나 누마루 앞 연당에 연을 심어 비 오는 날 연잎 위에 맺히는 물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번잡함을 잊고 시간이 정지된 신선의 장소가 된다.
누마루는 안에서 밖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햇빛, 달빛, 바람도 함께 머무는 장소이다. 더구나 누마루 앞 연당에 연을 심어 비 오는 날 연잎 위에 맺히는 물방울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번잡함을 잊고 시간이 정지된 신선의 장소가 된다.
--- p.126, 「누마루, 신선이 되기를 기원하는 공간」 중에서
한옥의 담 높이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휴먼스케일이 돋보이는 인간중심의 설계다. 골목길을 그냥 지나다닐 때는 잘 보이지 않다가도 조금만 관심 두고 발뒤꿈치를 꼿꼿이 쳐들면 집안이 슬쩍 보인다. 그것도 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보일 듯 말 듯 건물을 배치해 놓았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돌의 매력은 비정형성이다. 가공이 필요한 경우라면 불규칙적으로 쌓는다. 또 다른 매력은 적당한 크기이다. 돌 부재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준을 사람의 몸 크기로 삼는다. 바로 휴먼스케일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돌들이 극히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쌓여있다. 마치 삼라만상을 축약한 듯 다양함과 변화의 멋이 느껴진다.
--- p.174, 「전통한옥과 종교건축」 중에서
교회 건물은 하나의 성구이며 하나님 백성의 집으로 볼 때, 교회 공간에서 통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여정에서 자신의 영혼, 백성들 상호 간 소통의 매체이다. 통로는 지체함 없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 아닌 소통을 위해 잠시 멈춤을 하며,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회상하는 그 순간 자신의 육신을 비물질화하고 탈신체화 하는 공간이다. 통로는 신자들이 예배 중 평화의 인사 시간에 좌석에서 통로로 나와 서로 인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건축적으로 극장식 구조가 아닌 전통적인 평면 교회 내부 공간에서의 통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평등한 수평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일 없이 전례에 참여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서의신앙공동체 일원은 모두가 평등하게 통로에서 소통한다. 통로는 닫힌 공간에서 혈관 같은 ‘숨통의 공간’이다. 적절하게 뚫린 통로로 인해 닫힌 공간은 균형과 안정감을 가지며 교회 본당 공간의 제단을 향한 통로는 공간 전체에 질서를 주고 그 질서는 성도에게 구원과 삶을 향한 충동을 부여한다.
--- p.219, 「통로의 신학적 의미」 중에서
건축공간은 일종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공간 자체가 미학적 메시지인 것이다. 소린 밸브스는 각자의 주택이 위로를 주는 공간 치유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자신의 집이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이며 동시에 안식을 주고 위로하는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밸브스는 각자의 집을 신성한 사원과도 같은 ‘영혼의 공간’이라고 명명한다. 교회건축물은 영혼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가장 위로하는 공간, 가장 편안한 공간, 만인의 영혼을 위한 공간이자 만인의 가장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비난 하지 않고 모두를 위로하는 공간, 계산하지 않고 치유하는 공간, 소유욕에 지친영혼을 깨우고 그 상처를 벗어나게 하는 예배의 공간이자 공공성의 공간이 교회건축물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가장 영적으로 아름다운 교회건축이란 가장 공공적인 교회건축이다. 모든 생명을 자신에게 소환하는 절대미로서의 하나님에게 모두를 이끄는 신성한 아름다움의 공간이 교회인 것이다.
--- p.271, 「교회건축과 공공성」 중에서
교회의 본질은 예배하는 처소이면서 성서적 풍경을 품은 교회이어야 한다. 서로 오해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도 없고, 다툼도 없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어야 한다.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 교회 내에서는 통용되어야 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와는 다르게 과정이 중시되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성도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공공성을 지닌 교회가 가장 아름답다. 예배의 공간이자 공공성의 공간이 교회의 본질이다.
--- p.306, 「건물의 공공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