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탕수육을 튀기다가 손목을 크게 데었는데 서울서 같이 자취하던 둘째 오빠가 노발대발이었다. 부모님이 힘들여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중국집 주방에서 다쳐오기나 하느냐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막내 여동생이 무거운 웍이며 뜨거운 기름을 다루다 화상을 입고 왔으니 그야 오빠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나로서는 이미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이 단단히 굳은 상태였다. 오빠와 한바탕 크게 다툰 후 그길로 나는 담요 한 장을 들고 집을 나왔다.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출가할 나이에 나는 가출을 한 셈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이향방 선생님께 했더니, 옆 사무실을 얻어 요리학원을 차릴 계획인데 계단 밑에 창고가 있으니 아쉬운 대로 그곳을 쓰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그 창고 방에 문 대신 군용 담요 한 장을 치고 5센티미터짜리 스티로폼을 깔고서 이불 대신 내 옷을 덮고 잠을 잤다. 어쨌든 그 차디찬 잠자리에서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순식간에 잠들기는 했다. 잠이 참 달았던 건 낮이 고단해서였겠지.
--- p.18, 「수도꼭지와 군용 담요」 중에서
잠깐 내 인생을 돌아보자면, 신계숙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시기는 현재까지 3분기로 나뉜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울로 유학을 온 날이고, 두 번째가 요리를 처음 하게 된 날, 세 번째가 오토바이를 타기로 결심한 날이다. 그중에서 제일 서러우면서도 애틋한 순간은 바로 첫 번째, 아버지가 나를 더 많이 배우도록 세상에 내놓았을 때다. 부모님 두 분 다 자식들을 세상에 내놓고 그 뒤에서 조용히 김치를 나르고 좋게 찧은 햅쌀을 부대에 담아 나르셨던 것이다.
“여자라면 오히려 더 배워야지.”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내 인생의 어떤 지표가 되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느긋한 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울렸다. “계숙이, 너 하고 싶은 건 다 혀어.” 그럴 때면 내가 지금 당장 뭘 하고 싶은지 한참 생각해보곤 했다. 여자라면 오히려 더 배워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곧 배움이야말로 약한 사람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 p.29, 「어느 날 느닷없이」 중에서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자존심’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그 째만한 차를 타고 4년간 새벽부터 고속도로를 내리 달리던 적이 있었다.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 불러도 무조건 달려가던 요리 강사 시절이었다. 맨 처음 시작은 대전에 있는 한 대학의 평생교육원 중국요리 강사였는데 향원의 단골 한 분이 연결해주어 일하게 되었다. 향원에서 쌓은 인맥 덕을 이렇게 본 셈이다. 하지만 눈 오고 비 올 때는 아닌 게 아니라 그 길 내려가는 운전이 참 죽을 맛이었다.
그다음은 어쩌다 보니 가정 방문(?) 요리 선생을 하게 되었다. 시작은 대학 선배가 만들어준 강의 자리였다. 선배의 시누이 되는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 선배의 지인을 통해 소개가 뻗어나갔다. 모 기업 회장님의 딸, 며느리, 사모님 등을 상대로 요리 수업을 방문 판매원처럼 가가호호 다녔는데 이게 은근 대박을 쳤다. 다들 수업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한 것이다.
--- p.50~51, 「프라이드가 높으면 안 되나?」 중에서
시골집 벽을 바른 신문 속 한자를 보고 칠판에 한 획 한 획 모양을 따라 그리면서 동네 친구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던 꼬맹이가 그때 친숙해진 한자로 대학 전공을 정하고, 거기서 교수님 소개로 향원에 취업을 하고, 지금은 국내에서 비화교로서 드물게 중국어 고문을 해석할 수 있는 요리 연구가이자 현장에서 불판을 마주하는 중식 요리사로 나이 들기까지, 가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뒤를 돌아볼 때면 유독 그 4절짜리 칠판이 생각난다. 뭐든 쓰고 놀다 보니 쓰고 논다는 게 즐겁다는 것 또한 일깨우게 되었다.
--- p.68, 「칠판 하나에서 찾은 가능성」 중에서
먼저 질 좋은 삼겹살을 통으로 한 판 사서 갈비를 빼고 두꺼운 부분을 잘라 평평하게 만든다. 큰 들통에 물을 부어 대파와 생강을 넣고 삼겹살을 통째로 삶은 후 가로세로 5센티미터 크기의 정육면체 모양으로 반듯하게 썬다. 썰어놓은 삼겹살을 다시 끓는 물에 20분간 삶아 건진다. 두꺼운 그릇에 파와 생강, 월계수 잎을 깔고 삼겹살을 넣은 후, 노추라는 진한 중국 간장과 얼음설탕, 소흥주와 간장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때 밀가루 반죽으로 뚜껑의 틈새를 꽉 막아 여섯 시간 이상 아주 약한 불에서 뭉근히 끓인다. 동파육은 한 달에 몇 번씩 만드는 요리이지만, 이걸 만드는 동안에는 매번 참선하는 마음이 된다.
--- p.105, 「참선하는 마음으로」 중에서
어머니가 편하게 드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오래오래 정성을 다해 삶고 고았던 족발만큼은, 젓가락 들 힘도 없었던 분이 뼈만 앙상한 손가락으로 쥐고서 한두 개는 잡숴주셨다. 어머니께 드릴 족발을 살뜰히 싸 들고 대전역 앞 소제동 냇가를 건너면서 내가 여길 몇 번이나 더 올까 눈물을 삼키곤 했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해드릴 테니 한두 점만 더 잡수시라고 사정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열 달 동안 어머니 수발을 들면서 나는 잃었던 혹은 놓칠 뻔했던 하나의 귀한 관계를 고아냈다.
--- p.125~126, 「족발과 조청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중에서
여성과 남성을 떠나, 어떠한 환경 안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차별화하려는 노력은 중요한 것 같다. 내게는 굉장히,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던 중식당 주방에서 노동 강도가 제일 강한 튀김 불판을 맡았던 신계숙도, 연구실에서 손님들과 함께 고조리서에 등장하는 청나라 음식에 대해 연구하는 신계숙도, 방송에 나와 오늘내일 없이 마냥 놀러 다니는 사람처럼 신나게 오토바이를 당기는 신계숙도, 모두 어떠한 환경 안에서 나자신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본다.
--- p.159~160, 「여자와 주방과 세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