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리를 처음 본 것은 영화 〈애수〉였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으로 이어졌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햄릿〉 〈오셀로〉 〈리처드 3세〉 〈헨리 5세〉, 그리고 〈캐리〉 〈폭풍의 언덕〉 등의 명작으로 만났다. 이들의 연기에 압도당한 나는 저 찬란한 연기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들에 관한 자료를 보고, 이들에 관한 공연평과 연기론을 탐독했다. 두 배우가 이룩한 연기술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이들이 한시도 멈추지 않고 배우의 길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랑이나 이별도 이들에게는 인생사의 가혹한 시련이요 거품처럼 허무한 일이었지만, 더 풍성한 연기를 만들어주는 영감의 원천이자, 예술적 생애에 더욱더 집중케 했던 동기이기도 했다.(중략)
배우의 눈부신 연기, 탁월한 극작가와 연출가, 그리고 이들을 반기는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있으면 예술은 순조롭게 발전하고, 그 예술에 공감하는 인간은 마음이 흔들리면서 자신이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예술은 인류의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방향타이다. 올리비에와 비비안의 만남은 이 모든 일의 시작 같은 한 가지 상징이었다. 시인 릴케와 루 살로메, 파스테르나크와 올가 이빈스카야 등도 그런 창조적 본능이 점화된 만남이었다. 예술가는 그런 만남을 통해 ‘보다 가치 있는 예술’에 자신을 희생하고 몰입한다. 문명사는 그것이 결코 사적인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올리비에와 비비안과 어울려 차를 마시고, 함께 길을 걸어가며,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누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오늘의 각박하고 험난한 우리들 연극의 장(場)에서 나는 이들이 이룩한 일에 감탄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동료 연극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 「책 머리에」 중에서
올리비에는 아서 존 길거드(Arthur John Gielgud)가 주관하는 〈리처드 2세〉에 참여하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영화보다는 고전연극을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비비안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비비안은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그 현장에 올리비에가 왔다. 비비안은 왕비 역할을 맡았다. 비비안은 이 무대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비비안에게 〈헨리 8세〉 왕비 역 섭외가 들어온 데 이어, 코르다의 영화 〈무적함대〉에 비비안과 올리비에가 공동 출연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매일 촬영장에서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14주간 계속된 영화 촬영이 끝났을 때, 비비안과 올리비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비비안은 올리비에의 아내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비비안은 정감이 풍부하고 대담하고, 정열적이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비비안에게는 올리비에가 자신의 하늘이요 땅이 되었다.
--- p.20
런던과 뉴욕이 손꼽아 기다리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1949년 10월 11일 올드위치(Aldwych)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관객들은 커튼콜에서 올리비에 이름도 불렀다. 비비안 리는 열네 번 계속된 커튼콜 환호 속에 파묻히고, 극장 밖에는 500명의 팬들이 기다렸다. 비비안은 극도의 피로감 때문에 사인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일일이 응답할 수 없었다. 비비안은 앞으로 8개월 동안, 단 한 번의 무대도 놓치지 않고, 테너시 윌리엄스가 그려낸 몰락한 지주의 딸 블랑시의 삶을 너무나 실감 나게 재현했다. 비비안은 25세 때 스칼렛을 연기했고, 37세에 블랑시를 연기했다. 비비안의 연기 변신은 놀라웠다. 비비안이 그동안 이혼과 재혼, 전쟁, 병 등의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터득한 내면의 깊이는 연기에 매력과 박력을 더해주었다. 연기적 변신을 위해 과장된 분장을 시도했다. 암갈색 머리를 블론드로 염색하고, 의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할리우드의 명배우 베티 데이비스와 올리비아 하빌랜드가 블랑시 역할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 대신에 비비안을 초빙했다. 비비안은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의 대사 처리와 음색이 올리비에와 비슷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엘리아 카잔은 비비안의 연기를 성의를 다해 도와주었다. 광란 장면 연기는 비비안 최고의 명연기였다.
--- p.65~66
1962년, 로렌스 올리비에의 국립극장 예술감독 취임 소식이 치체스터 축제 시작 이틀 전에 알려졌다. 런던 연극계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그의 극장장 취임 가능성은 안개 속이었다. 영국에서 국립극장 법안이 통과된 것은 1949년으로, 영국 의회에서 최초로 국립극장 설치안이 제기된 후 101년이 지나서였다. 올리비에의 직업적 적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의 작품 선정 능력이었다. 올리비에는 당시 52세였다. 1950년 무렵 제임스 극장을 운영하던 시기에 그는 보수적인 작품 선정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 불만은 해소되었다.
1930년, 주당 50파운드의 배우였던 올리비에가 1961년 2월, 치체스터 축제극장에서 연봉 5000파운드를 받고, 지금은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을 맡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취임으로 저명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시빌 손다이크, 루이스 카슨, 이딘 사일러, 페이 콤프턴, 조앤 그린우드, 캐서린 해리슨, 존 네빌, 로즈마리 헤리스, 니콜라스 하넨, 앤드루 모렐, 티모시 베슨 등이었다. 이 집단에 조앤 플로라이트가 공연마다 무대를 빛냈다. 〈바냐 아저씨〉에 출연한 조앤은 소니아 역을 맡아 감동적인 연기를 해냈다. 관객들은 편지로, 전화로 조앤을 격찬하며 〈세인트존〉의 주인공을 맡아야 한다고 성원했다. 치체스터 축제 극장이 새로 채택한 레퍼토리의 3분의 2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재커비언(Jacobean) 시대 작품이었다. 체호프의 작품 〈바냐 아저씨〉는 대성공이었다. 올리비에는 아스트로브(Astrov)의 희비극적 성격을 거의 완벽하게 표출하면서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와 함께 80세의 손다이크, 87세의 루이스 카슨, 그리고 그린우드, 레드그레이브, 조앤 플로라이트 등 배우들이 협연하면서 찬란한 앙상블 무대가 창출되었다. 이 덕에 올리비에의 극장 운영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 p.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