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도 그리움을 준비했을까? 결혼과 맞물렸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내 안에서 팔딱거리는 불안감을 다독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만 좀 벌렁거리길 바랐다. 결혼을 남편과 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목적지goal’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지독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 문인화 모임에서 전각을 배우던 나는 마지막 수업 날, 선생님께 ‘참을 인(忍)’ 세 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좋아할 호(好)’를 써주셨다. 인사동 표구점에서 액자에 넣어 온 그 글씨를 볕이 잘 드는 다이닝룸에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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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대감이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는지 빼고 자는지 아리송했듯, 내가 그렇게 자주 누던 똥이 대체 어떤 근육의 운동으로 나왔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자각은 일상에서 무심결에 지나쳐온 무수한 시간을 불러냈다. ‘사려 깊게 선택하도록 깨어 있자’고 말과 글로 드러냈지만 정작 깨어 있던 시간은 책상 앞에서만이지 않았나 싶다. 그제야 내 주위를 맴도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자주 웃어주는지 챙겨보았다. 본능적으로 사랑을 쏟고 함박웃음을 지었겠지만, 더 많은 시간 동안 짜증을 흘리고 다녔을 것이다.
--- p.24
고향과 연결이 아득해질수록 타국의 일상은 덜컹거리고, 한 줌 달빛에도 울적해진다. 15년 전 이민자가 되면서 의식 밑바닥에서부터 공허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랜 쓸쓸함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 홀로 월남했다. 아버지의 환갑날, 열아홉 살이던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몽금포 타령〉이었다.
--- p.25
스물한 살 청년의 남한행에 얼마나 진한 순정이 담겨 있었을지 가늠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청춘이 큰 가치를 향해 뜨거웠었다는 걸 사무치게 깨달았던 순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흐른 겨울, 보스턴에서 놈 촘스키와 마주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의 젊은이들은 달랐어요. 하나 되어 살아가자는 열망이 절절했죠. 그때 통일의 꿈은 아주 뜨겁게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들이 그 열망을 살려내 남북한 모두 높은 인간적인 가치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 p.28
새 천 년의 열기로 세상이 들떠 있던 해, 블루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와 엄마의 또 다른 딸인 여동생과 함께 캠핑을 떠났다. 들판에서 별을 헤아리며 서른 해 가까운 시간을 넘나들었다. 어린 엄마가 사랑했던 남자는 블루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떠났고, 엄마의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입양 보냈다. 어린 엄마는 1년 반 뒤 다시 딸을 임신했다. 그 남자도 떠났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딸의 곁을 지켰다. 대학생 엄마였지만 강단 있게 키워냈다. 스물아홉 살 블루와 스물일곱 살 동생, 그리고 마흔여덟 살 엄마는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해마다 가을이면 셋은 그렇게 캠핑을 한다.
--- p.36
그즈음 앤디한테 물은 적이 있다. 나의 영어가 답답하지 않냐고. 앤디의 답은 의외였다.
“기죽지 마. 난 게이잖아.”
앤디는 동성애자다. 백인 남성임에도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음 30년 가까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고자 분투해야 했다. 처음 엄마에게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무수한 밤을 마음 졸였고, 새 직장에서 새로운 관계로 진입할 때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먼저 소개하고 복잡한 시선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나서야 10년을 함께한 파트너와 법적 부부임을 인정받았다.
--- p.50~51
말은 적게 하고 공연히 들떠서 스스로 부풀리는 짓을 하지 말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면한 첫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선한 눈을 가진 사람들한테 “어디서 왔니?” “무슨 일을 하니?”라는 질문을 받자마자, 지난 여섯 달 동안 매달린 연재 이야기를 쏟아내고 말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 나도 실제보다 과하게 부풀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p.66~67
요크 성벽을 비추는 불빛을 따라 시내에 있는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들르는 도시다. 밤 산책 삼아 걸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다리를 건너자마자 성벽 불빛이 꺼져 방향이 잡히질 않았다. 마침 펍에서 나오는 사내가 있길래 역에 꽂혀 있던 지도를 펼치며 호텔 위치를 물으니, 이름이 생소하다며 길 이름을 따라 방향만 알려주었다. 우둘투둘 수백 년 동안 다져진 보도블럭을 걷자니 역에서 택시를 타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취재비에 맞추느라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녔던 습관이 이번에는 몸을 고달프게 했다.
--- p.88
이민자 생활도 10여 년이 지날 즈음, 나는 ‘마이너리티로서 정체성 자각’을 이 땅에서 얻은 가장 값진 성과라 여겼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 점, 나보다 더 취약한 사람들과 한동아리가 될 수 있다는 넓어진 연대의식이 뿌듯했다.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취약한 이들의 다양한 사정이 하나하나 다가온다. 글을 쓰며, 내 안에 남겨졌던 잔상과 멍울을 퍼 올려 다독이는 사이 알아차린 세상의 힘과 관계의 밀도 속에서 마음의 터가 조금 다져졌나 보다.
--- p.93
몇 날을 궁리한 질문을 알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그의 말은 우리 대화를 어디인가로 데리고 갈 것이다. 인터뷰에 늘 도사리고 있는, 실제로 인터뷰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방향성이다. 첫 질문 전에 어색함을 풀기 위해 던지는 의례적인 덕담이나 인터뷰 공간에 놓인 소품에 대한 사소한 품평마저도 때로는 대화를 뒤틀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첫 질문과 녹음기만 준비해 간다. 첫 질문조차 바뀔 때가 있지만. 물론, 그 첫 질문이 나오기까지 내 안에서는 무수한 시나리오가 쓰였다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벼려져 나온 것이 첫 질문이다.
--- p.109
가이 왓슨은 힘들 때면 들판에 나간다고 했다. 들판은 그에게 스승이고, 그 스승의 가르침 속에 자본주의의 한계를 돌파할 해법이 있다고 했다. 텃밭 가꾸기 캠페인을 하며 봄이면 텃밭 농사 워크숍을 연다. 고객이 농사법을 배워 씨앗을 사가면 여름에 리버포드의 매출이 줄어들 텐데 괜찮냐고 물으니 껄껄 웃으며 들판에서 고랑 너머로 대화하는 농부의 목청으로 답했다. “당장은 매출이 줄겠죠. 그런데요, 길게 보면 농부들의 끈끈한 관계 속으로 한 식구가 더 들어오는 겁니다.”
--- p.177
“우리는 성장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관계를 살피기로 했어요. 지구와 관계, 다른 이익 당사자와 관계, 우리 직원들과 관계 말이에요. 성장은 반드시 그에 따른 부작용을 발생시킵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가치를 높이자고 시각을 바꾸면서 생산품도 달라졌습니다. 두 자릿수 성장을 할 때는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가져다 디자인만 변형해 팔기도 했는데요. 지역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겠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지역의 요구에 집중했습니다. 교육 교재도 다양해지고, 경쟁력 있는 제품과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파생되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공격적인 관계 맺기가 아니라 함께하는 관계 맺기를 시작했다. 회사의 인사 시스템도 수평적으로 바꿨다. 부서가 아닌 프로젝트 중심으로 경영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지원자를 받았다. 운전사로 들어왔더라도 특정한 프로젝트에 참가한다면, 그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궁리하고 생각을 표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는 모든 직원의 투표로 선정해 왔다.
--- p.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