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시간을 중국문학자로 지내온 필자 역시 인문학의 위상 추락을 만회할 비법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함은 당연하다. 필자는 인문학이 처한 위기적 상황의 근원이 인문학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조건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생각이고, 그렇다면 그 해법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만약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차제에 오늘의 인문학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을 짚어 보아 미래를 조망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 p.16
중국문학 연구자인 필자 역시 1990년대부터 이전까지의 중국시, 문학비평, 문예심미, 발전사적 궤적의 문제를 탐색하며 방법론적 갈증을 느끼던 차에, 우연히 현대과학이론을 문학과 철학 연구에 연결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출발은 김관도?유청봉 부부의 ??중국문화의 시스템론적 해석??으로서,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홍콩에서 불었던 ‘신삼론’인 시스템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였다. 이후 프리초프 카프라(Pritjof Capra)가 주도한 신과학을 거쳐, 이제는 현대과학, 서구 언어철학과 문예이론, 기호학, 수학철학 등 다양한 학제적 참조 속에서 동아시아 사유와의 조응 및 융합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의 연구지평도 중국문학이나 서구문예이론 자체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근원사유로서의 주역, 노장, 선학의 존재론적 접근 방식 및 그 현대적 소통의 문제로 확장하였다.
--- p.44~45
융복합의 시대인 오늘날 과학은 인문에게 손잡고 같이 가자고 손짓을 한다. 이제 인문도 더 이상 과학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인문과 과학이 손잡는다는 것은 문과와 이과 각자에게 상대가 다 필요함을 뜻한다. 현행 고등학교 제도의 문과와 이과의 분리에 대해 논쟁이 일어온 현실도 ‘인문 따로 과학 따로’의 기능주의적 분위기하에서, 이면에 내재된 해석학적이며 철학적 이해가 사라지고, 대신에 타성적이며 기능주의적 공부가 빚어낸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융합적 창의 인재의 중요성이 국가적 생존과도 직결되는 시점에서 인문학과 과학, 그리고 생각하는 철학의 손잡기가 뜬금없는 일만은 아니겠다. 그것이 ‘인문’ 본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낙오 혹은 외부의 조정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通卽不痛, 不通卽痛’이라는 한의학의 격언을 다시 새겨야 할 때이다.
이제 좋든 싫든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과학이 내미는 손을 계속 뿌리치고 있을 수만은 없다. 1980년대 어느 대학교에서 인문대학 혹은 문과대학에 ‘인문과학대학’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을 보고서, “인문학이 과연 객관성을 담보하는 과학적 학문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과학의 문명 선도성에 대해 부정하기 어려운 지금, 필자는 조금은 다시 생각을 보완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뉴 패러다임의 과학혁명시대를 사는 우리 인문학은 “과학과 떨어진”이 아니라, “과학을 생각하는” 인문 기반 학문으로서의 ‘인문과학’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인문기반에 과학을 참조하는 융합인문학을 필자는 ‘인문융합’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문융합의 시선과 학문하기가 바로 오늘의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싶다.
--- p.47~48
지난 십여 년간 필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특징되는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논점들을 과학철학, 종교철학, 문학철학적으로 동아시아 사유와 문예와 접목 연결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접목적 재발굴과 재해석은 그다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특히 인류가 아직까지 풀지 못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는 이 글은 학제간적으로 비교적 큰 거리를 지니는 광범한 영역에 대한 능력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이 필요할 것은 이 문제가 인간 존재와 세계 추동에 대한 인문학의 근본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5
이미 사실로서 증명된 현대물리학의 발견과 해석에 문제가 없다면, 동아시아 문학예술에 나타난 시공 초월 양상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순수 인문학의 관점만이 아닌 인문융합적이며 과학철학적인 새로운 접근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느낌 중심의 동아시아 문학예술은 실체 중심주의인 서구와 다르다. 흔들리고 울리며 퍼지는 느낌은 입자적이 아니고 파동적이다. 실체적이 아니므로 시공간적 구속이 덜하며 초월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 p.187~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