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주의는 ‘식인’(食人) 풍습 그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서구에서 유입되는 문화적 영향을 사대주의적 태도로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외면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브라질 고유의 문화로 빚어내자는 선언이었다. (…)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모든 세계의 집합으로서 ‘가능세계’에 대한 이론이나 ‘사변적 실재론’ 등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뒷받침하는 선구적 사상으로 소개되어왔다. 2000년대 이후에도 이는 동시대 인류학자, 철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비서구 중심의 인류세 담론에 기여하고 있다.
--- p.15~16,「땅끝 곶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역사들에 반대하며/조주현」 중에서
시각 이미지는 인류세의 개념을 잡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심지어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적 대중화를 꾀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의 이용에 대한 혹은 그런 재현물에 담긴 정치적 함의에 대한 인식을 거의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미지 혹은 재현물은 지질학적 개념을 예증할 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특정 방식으로 틀에 맞춘다. 또한 이 이미지들은 잠재적으로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비판적으로 분석해본다면, 일부 인류세 이론의 기본 주장을 반박하고 복잡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p.54~56, 「인류세에 반대하며 - 오늘날 시각문화와 환경/T. J. 데모스」 중에서
인류세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첫째, 시각성의 조건에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며, 둘째로는 세계가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개는 인식론적 결과이자 현상학적 결과다. 즉 이제 이미지는 세계의 형성에 관여하는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이루는 사유의 형식이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지식은 시각적 소통에 기반하기에 지각에 의존하며, 따라서 광학적 마인드의 계발이 수반될 것을 요구한다.
--- p.71~72쪽, 「이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 보고자 하는 인류세의 욕망/이름가르트 엠멜하인츠」 중에서
내 작업은 인류세의 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발전했다. 5년 전 처음으로 ‘인류세’라는 용어를 접하며 받은 반응은 아마도 충격과 절망의 하나였을 것이다. (…)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생태학적 위기는 가장 중요한 글로벌 정치 이슈가 되었다.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사고와 미학적 논쟁 또한 절망의 순수한 표현으로부터 앞으로 다가올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이나 21세기의 조건에서 가치 있는 존재에 대해 관점을 바꾸는 다양한 대안적 사고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나도 예외는 아니다.
--- p.102~103, 「원석/주앙제제」 중에서
사물이 살아 있다는 얘기는 죽어 있던 사물들이 갑자기 살아나서 뛰어다닌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을 대하는 인간의 관점과 태도가 변하여 그것들의 섬세한 힘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물의 힘이 커졌다거나 사물이 갑자기 중요해졌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p.123, 「사물은 살아 있다/이영준」 중에서
근대 미술관의 전시 모델은 우리와 예술 간의 관계를 설정한 기본 배경이 되었으며, 근대 미술관의 상징적·인식론적 작동 방식이 근대의 많은 규범적 명령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인류세 단계’에서 근대 미술관의 역할은 근거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 p.130, 「천체투영관에서 - 인류세 단계에서의 근대 미술관/뱅상 노르망」 중에서
식인주의와 식인주의 영화가 무언가 색다른 것을 제공할 수 있을까? 식인주의는 탈식민지적 실천으로서 존재론적으로 채굴주의extractivism에 저항하며, 우리는 식인주의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채굴주의가 자연을 예비적 존재로 혹은 생기론적으로 살아 있는 자연으로 상상한다면, 이러한 자연의 가치란 시장의 소비를 위해 삼켜버릴 수 있고 소화할 수 있고 쉽게 휘저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식인주의는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생명력을 상상하고 소비자를 집어삼킬 수 있는 음식의 잠재력을, 또는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한때 소비자로서 소비하는 것을 추구했던 누군가가 음식에 삼켜질 가능성을 상상한다.
--- p.202, 「식인주의에 관한 영화인가, 식인주의 영화인가?/포레스트 커리큘럼」 중에서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시스템에 큰 변화가 일어나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새로 해야 할 정도가 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제안된 인류세 개념은 21세기 재난에 대해 어떤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까? 허리케인, 폭우, 산불은 인간이 배제된 ‘자연현상’으로 보기 힘들고, 물, 공기, 풀, 나무 등의 물질뿐만 아니라 제방, 댐, 빌딩, 공장, 도로 등의 인공물과 매개하여 나타나는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다. 사회에서의 대응 방식과 복구 과정 또한 재난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인류세 개념은 비인간 현존물의 행위성을 받아들이고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사이의 네트워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인류세 논의는 단순히 손상된 지구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 p.281, 「우리는 모두 인류세 난민이 될 수 있다/박범순」 중에서
우리가 인류세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비인간들과 함께 엮인 친척의 매듭으로서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기대고 있는 존재인지를 느끼지 못한다면, 서로 기대고 있는 자들의 상호적인 번성을 위해서 무엇과 단절하고 무엇을 새로 연결해야 할지를 모색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이 지구에서 영원히 축출되어버릴지도 모른다.
--- p.301, 「인류세를 빠져나오기/최유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