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고 72년 10월에 한국마임연구소라는 거를 에저또가 발족을 해. 그러니까 이제 판토마임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극단, 우리나라에 마임이라는 거를 연구하자. 그런데 여기에 멤버가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님과 그 당시 김세중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셨던 무세중 선생님. 그러니까 서양의 판토마임을 그대로 하는 게 아니라 우리한테도 이런 게 있지 않느냐 그래서 한국마임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그 연구소 발족 세미나와 함께 하는 공연이 『첫야행』(1972.10)이었어. 그때 표현이라는 거는 벽돌 나르기, 걷기 등 단편적인, 스토리보다는 마임에는 이러한 표현이 있다 이거였고,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25분 정도 공연은 처음이었지.
--- p.29, 「마임배우로서의 첫 걸음 『첫야행』」 중에서
근데 나는 이미 제대 때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가면 어떻게 할까, 나가면 어떻게 할까. 그런데 에저또가 창고극장을 마지막으로 문 닫는 공연이라서 같이 하게 됐고, 그 다음 극장 짓는 일에 관여를 할 때 방태수 선생한테 에저또로부터 나오겠다고 얘기를 했어. 나는 이제부터 마임의 길을 가겠다. 나 독자적으로. 그리고 다시 극장을 다 만든 다음에 한 공연이 내 이름으로 처음으로 공연한 『육체표현』(1976.4).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지.
--- p.36, 「이제부터 마임의 길을 가겠다’」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내가 72년부터 79년까지 내 나름대로 구축해온 만들어온 나의 예술세계라고 볼 수 있어. 예술세계가 한꺼번에 다 꿰어진, 그래서 글(예술기획 공연수첩1-유진규의 마임, 예술기획, 1990)로도 정리했거든. 유진규의 연극관이라 그럴까 유진규가 생각하는 추구하는 그런 예술세계. 하는 얘기는 늘 같은 말이야. 뭘 보려고 하지 마라, 널 봐라. 자각하라.
--- p.51, 날지 못하는 새를 위하여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나는 마음을 정리했어. 다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어디든 가서 살겠다. … 그때가 언제냐 하면은 광주사태로 다 잡혀가고 완전히 폭력으로 다스릴 때야. 김성구랑 같이한 공연에서도 내 마지막 작품이 애국가가 나오면서 온갖 물고기가 다 그냥 산산 조각나는 「낚시터」라는 작품이었거든. 물고기 잡다 안 잡히니까 폭파시켜. 그냥 다 산산조각을 내 버리는.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 잡혀가고 싸우고 뭐 하고 그러는데 나는 그러지도 못하고 서울서 뭐 마임한답시고 이러면서 산다는 게 좀 부끄럽더라고. 그냥 시골에 가서 조용히 살자, 다 버리고 시골 가서 조용히 살자. 그렇게 춘천을 오게 된 거지.
--- p.59, 「스물아홉에 은퇴선언, 서울을 떠나 시골로」 중에서
몇 년을 한량같이 흥청망청 놀고 그랬어. … 그럴 때 신영철이가 찾아왔어. 그게 87년 12월 말일거야. 그 친구가 오더니 한국마임이 멸종위기다, 이제 그만 놀고 다시 네 할 일을 해야 되지 않느냐. 근데 사실 그 당시 영철이가 얘기할 때는 안 한다, 그랬어. 전혀 생각이 없었어. 난 이제 마임계도 떠났고 그냥 여기서 생활, 일종의 내 나름대로의 생활이지 뭐. 카페하면서 이렇게 어울려 놀면서 그냥 지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 p.69, 「한국마임이 멸종하고 있다. 돌아오라!」 중에서
서울서 공연이 끝나고 모여가지고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있으면서 이게 계속 지속적으로 이 힘을 끌고 나가야 되겠구나 하는 감? 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우리가 좀 정기적으로 모여 갖고 한국마임발전에 대해서 논의를 하자 해서 그 당시 나, 유홍영, 임도완, 심철종, 최규호, 김성구, 신영철 이렇게 모여 갖고 논의를 했지. 우리가 어떻게 힘을 모아서 다시 한 번 마임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하는 데 그 중 가장 좋은 건 페스티발을 열자였어. 〈한국마임페스티발〉을 열자!
--- p.75, 「마임 부활운동시작」 중에서
전통이라는 거를 내 작품에 끌어들여가지고 그거를 잇거나 그거를 바탕으로 해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 그런데 눈앞에 걔네들이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아! (탄식) 내가 그때 일본에 갖고 간 작품이 「머리카락」이었거든. 머리카락은 서양의 판토마임을 우리의 이야기로, 한국현대사회의 이야기를 서양의 판토마임으로 표현한 거란 말이야. 그러면서 이제 스스로에게 부끄럽더라고. 내가 한국서 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오히려 야~ 판토마임을 우리나라에서 하다니! 한국 사람이 이런 거 한다니까 오히려 더 그래, 나 이거하는 사람이야 우쭐했는데 나가보니까 완전히 쪽팔리는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 정체성이라는 말, 넌 도대체 누구냐. 그런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됐지.
--- p.84, 「해외에서 찾아낸 나의 마임과 축제」 중에서
『빈손』(1998.2)을 설명하려면 뇌종양 하고 뗄 수가 없어. 그게 결국 작품으로 나온 거고 삶에 대한 태도도 그렇지만 작품관도 바뀌게 됐지. 그 전까지는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그게 뭐든 간에 그것과의 갈등 내지는 억압 내지는 뭐 그런 관계 속에서 그 존재가 정상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그거 때문에 왜곡된 모습으로 변질 내지는 변형이 된다 그러면서 이제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그 모습들을 보여 주면서 작품을 했다면, 뇌종양 때문에 내가 거의 8개월을 공식적으로 대외활동을 멈추고 스스로 내 문제로 들어가서 얻은 결론은 모든 문제는 외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내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거지.
--- p.115, 「시련이 준 선물은 『빈손』」 중에서
- 유진규가 사라지면 유진규 공연도 사라지나
방 시리즈를 기획한 건 그게 궁극적으로는 나도 뭐 쉽게 말하면 10년이 남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내 마지막 작품은 유진규가 없으면 공연을 못 하냐, 내가 움직이지 못하면 공연을 못하냐, 내가 사라져 버리면 내 공연은 끝나는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사라져도 공연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떨어지는 거야. 내가 생각한 것은 어쨌든 나는 공연자잖아. 그렇다면 공연으로 끝까지 살아남아야 되는데.. 그게 이제 나에게 남은 해결해야 할 질문 숙제이지.
--- p.128, 「교통사고가 만들어 준 『빨간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