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세력은 국가주의의 극대화를 통한 산업화,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외적 성과가 오히려 서구 근대화의 길을 따라갈 여건이 되지 못했던 사회의 엘리트에게는 대안적 근대화의 선택지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였고, 그들은 이를 환영했다. 이는 냉전 기간 중 여전히 다면적 근대화의 한 방식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한때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소련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의 길을 따랐다. 그 유효기간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동유럽 사회는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에 이미 이 선택지를 포기했다. 그 해체 과정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국가는 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여전히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현재 비서구적 근대화의 길이라는 노선을 대표하는 사회는 중국이다. 어쩌면 러시아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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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자금은 상하이 한인공산당이 한인사회당 계열과 비한인사회당 계열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상하이 한인공산당 내의 한인사회당 계열 인사들은 새로운 임시정부의 창설을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통한 최고혁명기관의 재조직에 나서기로 했다. 그를 위한 전 단계로서 모스크바 자금을 고려공산당의 조직과 활동에 쓰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김립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여운형, 안병찬, 김만겸 등 비한인사회당 계열의 한인공산당 간부들에게는 자금에 관해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즉, 여운형에 따르면 김립은 “원동공화국 총리 크라스노쇼코프와 회견했으므로 모스크바에 갈 필요가 없었다고 하면서, 1만 원을 교부받아 3000원은 여비로 쓰고, 7000원은 소지하고 있지만 임시정부에 교부할 필요가 없고 고려공산당에서 사용하여야 한다”라고 ‘허위 보고’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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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까지 각각 자신의 이론 혹은 사상을 당 헌장에 삽입했지만 이데올로기의 요소는 약하다. 사실 지금까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틀에서 벗어난 사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사상은 덩샤오핑 이론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시진핑이 이번에 발표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은 스스로 사상이라고 붙인 만큼 향후 시진핑의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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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인텔리겐치아의 주도로 제1차 카자흐 대회는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해 남녀평등에 기초한 여성의 법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고 카자흐 사회의 전근대적 상징인 신부대(Kalym)를 금지했다. 제1차 카자흐 대회는 식민 정책의 극복과 카자흐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핵심 도구로 교육을 강조하면서 초등교육의 의무 시행을 결의했다. 특히 제1차 카자흐 대회의 대표들은 카자흐성의 확립을 통한 지식 세대의 육성을 위해 초기 2년 교육과정은 반드시 모국어인 카자흐어로 이행하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 카자흐성의 보전에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했다. 사실상 카자흐 인텔리겐치아에게 카자흐인들의 민족적 자각과 정체성 확립, 카자흐 사회의 개혁과 근대화는 절대 가치였으며 이를 위한 기본 토대가 바로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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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앙골라와 에티오피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는 왜 존재감이 없을까? 반면에 중국은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국가가 되었을까? 21세기 중국의 대아프리카 전략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1959년 이후 냉전과 국내 정치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외교 정책의 결과였다. 1990년대 이전 중국의 대아프리카 외교 정책이 결국 21세기에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패권주의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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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측에서는 연합국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기 위한 명분을 얻고자 레기온으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서구 학계에서는 그 반대로 연합국 측이 러시아에 개입한 주된 이유는 레기온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가 어쨌든 레기온 반란은 소비에트 러시아뿐만 아니라 반혁명 세력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연합국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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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실패한 공화국이지만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의 의의는 유럽 현대사에서 간과할 수 없다.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최초로 프롤레타리아가 정권 획득에 성공한 혁명적 사건이다. 쿤 벨러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에서 배운 혁명의 정신을 그대로 헝가리에 적용하고자 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이상적인 인민공화국 건설을 꿈꿨던 것이다.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기대는 지식인, 일반 대중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작가와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활동에 공산주의 이상을 적극 반영했다. 특히 다분히 유토피아의 이상과 환상을 가진 작가들은 새로운 세상의 모델로서 소련을 상정했고, 그것의 헝가리식 변용으로서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을 고려했다. 이렇게 지식인과 인민 대중 양측으로부터 유례없는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은 헝가리의 현실을 무시한 쿤의 이상적인 정책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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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서당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흑인 신좌파 그룹이다. 그러나 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 흑인해방운동을 펼친 사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대체로 68운동의 신좌파가 구좌파의 사상 및 이데올로기와 단절된 세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와 달리 블랙팬서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반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의 현실을 반영한 혁명 이론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미국 흑인의 경험에 적용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같이 혁명과 집권에 성공하거나 정치적인 정당이 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정당으로 간주했고 흑인 혁명 세력의 전위당으로서 행동했으며 사상과 이론, 그리고 정치적인 실천 프로그램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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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볼셰비키 정권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레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통해 푸틴은 청중에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부가 소비에트 정권 초기 무분별하고 잔인한 살상을 통해서 정권을 수립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 이제까지 러시아 국가 지도자가 비록 개인적 견해임을 밝혔지만 공식 석상에서 소련의 국부 레닌의 부정적이고 비도덕적인 면을 이 정도로 폭로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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