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안티파스, 헤로디아, 그리고 살로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권력자? 맘만 먹으면 세상에 자기 맘대로 못할 것이 없는 자? 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불안하기에, 헛된 소유욕으로 치우친 편심으로 가득한 자들이다. 그것이 헤롯 안티파스처럼 성장 과정에서 형성되었든, 아니면 헤로디아처럼 결혼을 통해 만들어졌든, 아니면 살로메처럼 부모에게 학습되어 자기 것이 되었든, 그들은 세상의 것을 다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한없이 깨지기 쉽고 흔들리기 쉬운 사람들이다.
자신의 내면이 약하니, 치우치기 쉬우니, 내면의 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떤 공격에도 깨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더 두껍게 포장한다. 내 얼굴의 주름을 보이지 않기 위해 더 두껍게 화장을 하듯, 그렇게 내 자신을 감추고 헛된 것으로 채우려 한다.
--- 「1부 1장, 나침반과 같은 인생」 중에서
영적으로도 이런 ‘자기만의 공간’ 문제는 중요한 화두다. ‘슈필라움’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면, 영적인 공간 즉 ‘스피리추얼 라움’은 ‘내 마음껏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적 공간’이다. 전자인 ‘슈필라움’은 자기 멋대로 하는 공간이라면 후자인 멈춤 ‘스피리추얼 라움’은 하나님의 초대에 우리가 들어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공간 즉 사막과 광야로 들어가서 주님을 깊이 만나기를 사모했다. 그렇게 1,500년 전 ‘베네딕트 공동체’가 태동했고, 290년 전에는 얀 후스Jan Hus의 후예들이 ‘헤른후트Hernhut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70년 전에는 맨발의 성자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님이 한국 개신교 최초로 ‘동광원東光院’이라는 수도원을, 얼마 후에는 엄두섭 목사님이 은성수도원을 만들어 ‘스피리추얼 라움’ 즉 영적 공간을 확장시켜 나갔다.
나에게 그런 영적 공간이 있는가? 나를 위해 내 멋대로 하던 슈필라움의 욕망이 그치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는 공간, 내가 잠잠해지고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느끼는 공간, 그런 공간이 있는가? 가장 바람직한 것은 내 맘대로의 쉼의 공간인 ‘슈필라움’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스피리추얼 라움’이 되는 것이다.
--- 「1부 3장, 슈필라움(자기 틀)에서 스피리추얼 라움(영적 자리)으로」 중에서
지라르가 설명하는 모방욕망이론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모방욕망이론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가득 찬 방에서 놀고 있다. 한 아이가 특정한 장난감을 잡는 순간, 다른 아이들이 즉시 그 장난감을 붙든다. 분명 그 놀이방에는 수많은 장난감이 즐비함에도 말이다. 그리고는 ‘내가 너보다 먼저 잡았다고, 아니라고 네가 잡기 전에 내가 먼저 봤다고’ 우긴다. 주변에 수많은 장난감이 있음에도 친구가 먼저 잡은 장난감에 마음이 더 가는 심리가 ‘모방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라르의 이론은 ‘주체-라이벌-대상’이라는 삼각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 「2부 2장,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 중에서
하나님을 먹어야 세상의 어떤 갈증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마셔야 얕은 호흡, 얕은 생각, 얕은 시선, 얕은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깊게 마셔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눅 5:4)”라는 예수님의 명령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호흡이 짧아졌다. 예레미야 2장 13절의 말씀처럼 ‘깊은 숨, 깊은 물(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나니, 인간은 갈증과 얕은 호흡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스스로 물을 저장하기 위해 웅덩이를 파고 스스로 자가 호흡을 하기 위해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나 이는 터진 웅덩이고 바람 빠진 산소통이었다. 인간은 더욱 초조해졌다. 하나님을 버렸으니 숨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렸으니 얕은 숨,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연명하고 있다.
--- 「3부 3장, 침묵: 깊은 호흡의 회복」 중에서
신앙은 이런 것이다. 멈추는 것이 신앙이다. 모두 바쁘게 자기의 얕은 호흡, 불안한 심리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상황을 멈추고 참 호흡되신 그분의 숨을 다시 얻는 것, 내가 멈출 때 비로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 내가 진짜 추구했던 갈망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 하나님이 내게 진짜 원하시는 그런 참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멈추기 위해 광야로 나아가지 않는다. 조금 더디 가도 좋으니 조금 늦게 가도 좋으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는 방향이 맞는지 묻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한다. 그렇게 내 갈망을 모르니, 남이 욕망하는 것이 내가 정말 찾고 있던 갈망인 줄 알고 남의 것을 모방욕망한다. 시기, 원망, 비교, 무시, 또다시 나는 더 큰 엔진을 장착하고 남보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박수받는 욕망의 굴레에 빠져 산다. 어느 순간 나는 아주 건조하게 되어 영혼이 마치 거북이 등가죽 갈라지듯 아주 건조하게 살아간다.
--- 「3부 6장, 기도를 통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