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염색, 디자인, 건축, 예술, 교육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유강열과 그의 활동에 동반한 예술인들이 이룬 업적의 상관관계는 현시대 다각적인 문화 현상 속에서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상을 설정하는 데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들이 시대에 조응하며 각 장르, 영역들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확장된 상상력의 기반을 다지는 단서를 축적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p.11,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윤소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중에서
그렇다면 이번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전이야말로 미술과 공예, 공예와 디자인, 한국적 전통과 서구 지향, 대학 미술교육과 미술 현장, 이론과 실천, 행정가/기획자와 작가의 사이를 거침없이 오가며 활동했던 예술가 유강열의 예술세계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는 문화적 식민성의 프레임을 거둬내어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 p.178, 「’공예’너머, 공예적인 것에 대하여, 이인범(IBLee Institute 대표)」 중에서
그는 염색공예를 전담하면서 실크스크린에 의해 염색공예와 판화작업을 통합하여 교육하였다. 예술적 작업도 중요했지만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디자이너로서의 역할도 함께 고민한 것이다. 1966년 수출 산업제품의 개발 촉진을 목표로 시작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이하 ‘상공미전’)≫에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섬유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하게 되었다. 염색작업이나 판화작업이 순수미술적 성격이 강하다면 실크스크린은 아직 활발하지 않았던 텍스타일 디자인을 위한 원형 디자인으로 기능한 것이다. 특히 1970년대가 되면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산업공예가 당면과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여 그의 만년의 작업은 원색의 강렬한 색상이 강조되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예술적인 공예와 실용적인 디자인이 공존하게 된다.
--- p.188, 「유강열의 생애와 조형세계,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중에서
그렇다면 미국 연수 이전과 이후, 유강열의 판화에 관한 생각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미국 연수 전 유강열의 판화 작품은 주로 크리스마스 카드와 같은 소품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제작했던 목판화 가운데 카드에 사용된 작업들은 한국조형문화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시기의 작품들로 이는 판화, 염색, 도자 전통의 현대적 대중화라는 연구소의 설립 목적이 반영된 것이었다.13) 1950년대 유강열이 제작했던 판화가 모두 회화의 2차적 보완물로써, 또는 복제를 위한 매체로 사용됐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연수 이후 제작한 판화 작품은 그 이전의 것에 비해 독자적 예술 작품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 p.195, 「격랑의 조형가 유강열: 1950년대 후반 미국 연수를 중심으로, 조새미(서울교육대학교 강사)」 중에서
한국에서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1960년대 유강열은 미술과 공예의 제도 구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경제에 올인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새로운 인간형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그려나갔던 앞의 김승옥의 소설은 당대적 삶을 짐작하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근면 성실한 근대화의 역군이라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텔레비전 안테나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대중 사회의 패션에 동화되고, 현대 도시민의 표피적 삶의 패턴에 민감해져가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사회의 일원이다.
--- p.205, 「1960, 70년대 한국 ‘공예계’ 지형과 유강열의 위상: ‘호모 이코노미쿠스’시대, 미술공예와 판화의 정초, 박남희(홍익대학교 연구교수)」 중에서
나는 이 소론을 하나의 명확한 명제에서 출발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인간에 관한 문제이다. 결국 인간은 세계 속에 나타난 최초의 부(富)이며 최고의 부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적 생명이야말로 생(生)을 굳히며 생을 주장하고 끝없이 발전하려는 구성적인 생명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디자이너를 어떤 기술인이기보다는 그러한 기술에 선행해서 생각해야 할 인간이라는 전제 조건 위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 p.216, 「구성과 인간: “한 공예미술가의 입장에서”, 유강열」 중에서
대학 3, 4학년 때 유 교수님의 수업은 박물관 유물 스케치, 관심 있는 사물을 드로잉 하기, 스케치북의 소중함 등을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예민한 감성과 섬세한 관찰력을 키워주는 것들이었다. 유 교수님은 매우 과묵한 분이셨다.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전해주셨고, 인자한 미소로 계속 해보라는 말씀으로 꾸준히 작업에 전념하는 자세를 일깨워 주셨다.
--- p.222, 「’유강열아카이브’ 기증을 회고허며, 신영옥(작가, 유강열 제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