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브리지는 바로 위로 지나가는 붐대가 햇살을 가려주기 때문에 편하게 누워 바다를 바라보며 낮잠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가끔 바람에 배가 돌아가 햇살이 얼굴을 비추면 슬쩍슬쩍 그늘로 자리를 옮기면서 뒹굴뒹굴하는 맛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말 그대로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다. 건강 걱정, 돈 걱정, 사람 걱정, 나라 걱정…. 온갖 뉴스가 초단위로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우리 뇌가 그런 많은 정보의 홍수에 대처하도록 진화하려면 못 해도 한 1,000년은 걸릴 거다. 그래서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나 조울증 환자들이 급증하는 건지도 모른다. 배에서의 생활은 그 반대다. 수평선은 생각이 끊기는 자리다. 사실 생각이 필요 없다. 몸이 반응하여 바다에 배를 맞추는 것이 항해다.
--- p.43~44, 「나마스테호의 선상 파티」 중에서
나마스테호에 도착하니 잭의 배에서 일하는 필리핀 미녀 세 명과 조금 전 잭이 육지에서 태워온 프랑스 영감 둘이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모두 내가 어색해하는 프랑스식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하지만 볼록한 젖가슴을 가진 미녀 세 명과의 프렌치식 인사는 당연히 즐겁다. 그의 배는 25억 원 이상 주고 2년 전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한 아델사에 주문 제작한, 돛대가 두 개 있는 스쿠너 타입 요트다. 헤드 세일도 두 개이고, 모두 전동 윈치를 이용해 스위치만 누르면 자동으로 돛을 펼치고 접을 수 있다. 따라서 크루 멤버는 아름다운 20대 미녀들만 써도 배를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잭은 190cm의 훤칠한 키에 60대 후반의 진주 양식 사업가다.
--- p.45~46, 「나마스테호의 선상 파티」 중에서
이제 표 항해사와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 수분 내에 돛을 펼치고 전기모터는 1단으로 유지하여 7노트의 속도는 나오도록 한 후 비로소 커피를 내렸다. 동생은 아침 식사를 위해 달걀 라이를 만들고 식빵을 굽느라 바쁘다. 생각보다 많은 어선들이 바다에 나와 있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선교에서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자동항법장치의 버튼을 수시로 누르며 어선들과의 조우에 대비하며 항해를 계속했다. 필리핀 어선들은 사실 조그만 쪽배 수준의 1~2인용 방카선이 대부분이었다. 조그만 휘발유 엔진을 달고 시속 7~10노트로 멸치나 고등어를 잡으러 다니는데 가끔은 참치를 잡기도 한다. 워낙 배의 높이가 낮아 파도가 조금만 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선은 아무리 작아도 어선이다. 그들은 조업시 우선권이 있어 우리 돛배가 먼저 항로를 바꿔 가야 할 의무가 있다. 괜히 접촉 사고라도 나면 낭패다.
--- p.115~116, 「민도로해협을 건너 코론섬으로」 중에서
며칠 사이 칠흑 같은 어둠에는 적응이 되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6km 떨어진 외진 바닷가 골짜기, 그것도 칼 같은 벼랑으로 둘러싸여 더더욱 빛이 들어올 수 없는 요새 같은 곳에서의 정박이 주는 문명으로부터의 단절과 대자연 속 평화로움은 내 배 없이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큰 거금을 들여 요트를 사고, 배를 꾸미고, 항해 장비를 갖추고, 수년에 걸친 공부와 연습을 통해 항해술을 배우고 먼 바다로 나와 이런 귀한 곳에서 마주친 밤시간의 고요함…. 일행이 다 잠든 밤 혼자 선교에 나와 앉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 바닷속에서는 야광충들이 반짝이고 밤하늘은 은하수와 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박쥐와 이름 모를 새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고요함 속에서 찰박이는 물결 소리, 밤새 소리, 물고기 뛰는 소리, 벌레 우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다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수많은 소리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p.139~141, 「트윈 라군」 중에서
요트를 타보면 7~8노트(시속 14~15km)가 얼마나 빠르고 통쾌한 속도인지 알 수 있는데 글로는 설명이 어렵다. 더더욱 이곳은 민도로섬에 가려져 파도가 없기에 선체의 진동도 없다. 돛은 팽팽하고 선교에 앉아 있으면 시원하다. 앞돛과 주돛의 균형이 맞고 배의 무게중심과 돛의 풍압점이 일치할 때 배는 떨림이 없고 세팅한 자동항법장치가 정해준 항로대로 쭉쭉 밀고 나간다. 바람이 좋아 8노트 넘는 속도가 나오면 배에 탄 모든 식구들은 싱글벙글한다. 요트의 세계에서는 8노트가 꿈의 속도다. 차를 운전할 때는 시속 15km가 느리게 느껴지지만 배를 몰다 보면 엄청 빠른 속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선교의 그늘진 곳을 찾아 음악을 듣다 낮잠을 즐겼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한 방향에서 불어주니, 가끔 고개를 들어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고깃배가 있는지 확인하거나 혹시 어구들이 우리 항로상에 있는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후 들어 예보대로 역시 바람이 잦아들었다.
--- p.177, 「필리핀 최고의 해상공원 아포리프」 중에서
배를 관리하는 일은 참 어렵다. 기계에 대해 잘 알고 이것저것 고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 배의 수리는 항상 난제 중의 난제다. 수천 개가 넘는 수많은 부품들과 배관, 돛, 로프, 하다못해 작은 나사 하나, 볼트 하나도 범상한 것이 없다. 조금만 신경을 안 쓰거나 방치하면 녹슬고 햇빛에 삭아내리거나 부서졌다. 배의 밑바닥은 따개비와 해초가 수시로 붙어 자라고 구멍이란 구멍은 조금만 방치하면 막힌다. 항구에 정박해놓아도 전기적 방식이 일어나 프로펠러나 세일 드라이브가 녹아버린다. 그걸 막기 위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배 밑에 붙은 아노드라고 하는 부식 방지판을 바꿔주어야 한다. 또 매일같이 새들이 날아와 희디흰 갑판 위에 배설물을 뿌려놓는다. 여름과 가을에는 1년에 서너 개의 태풍이 돛대 위로 지나가 바람에 돛이 터지고 묶어놓은 계류줄이 끊어진다. 25m 마스트 꼭대기의 바람개비가 부러지면 누군가 마스트 승강용 의자에 앉은 채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 교체 작업을 해야 한다. 조금만 습하면 침실과 옷장에 곰팡이가 금세 시커멓게 피어나고, 그걸 없애기 위한 고생은 말도 못 한다. 돛폭 속에는 새들이 새끼를 치고 물어다 먹인 먹이나 씨앗, 배설물이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또 새끼들이 다칠까봐 다 자라서 날아갈 때까지 돛도 함부로 펼치지 못한다.
--- p.239~242, 「벗삼아호 전면 보수 작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