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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 황교안 고백록

김우석 | 밀알 | 2021년 02월 0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3 리뷰 3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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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294쪽 | 454g | 152*225*14mm
ISBN13 9788941803331
ISBN10 894180333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2020년 4월 15일 총선은 참으로 아팠다. 국민의 삶을 지켜낼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대한민국 되살려내기에 실패한 책임으로 당 대표직을 사퇴했다. 국민께 죄송한 마음으로 엎드려 사죄했다. 총선이 끝난 후에도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저와 우리 당을 응원해 주신 국민들, 함께 고생했던 당원들, 당협위원장들, 그리고 국회의원들께 가슴 찢는 사죄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런데 김우석이 찾아왔다. 나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책으로 진실을 담고 싶다고 했다. 고민 끝에 동의했다. 정치권에 들어온 후 지난 2년을 뒤돌아보고 정리하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백록이며 참회록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지난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지금도 안타까운 분들이 너무 많다. 그분들이 앞으로도 국민과 나라를 위해 더 큰 역할을 하시리라 믿고 응원한다.
--- p.5~6, 「황교안 추천사」 중에서

· 이 책은 정치영역에서 ‘리더십’과 ‘통합’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현실 정치영역에서 ‘리더십’과 ‘통합’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둘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리더십이 강하면 자연스럽게 그 리더십이 미치는 영역은 확장된다. 위대한 리더들은 대부분 영역과 영토를 확장했다.

· 리더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나는 소금의 삼투압(渗透壓)을 활용해 리더십을 설명한다. 소금의 농도가 높으면 주위의 수분을 끌어들인다. 소금이 리더고 물은 백성이다. 어느 나라가 리더십이 강하면 타지의 백성이 스스로 알아서 부의한다.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때 소금은 물에 고단하게 설명하거나 유치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소금이 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것이 ‘무위의 통치’(無爲之治)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물 흐르듯 사회를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리더가 낮아지거나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백성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이란 것이다.

· “승리한 정당의 승인(勝因)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패배한 정당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총선패배 후 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당에 별도의 기구를 두어 백서까지 펴냈다. 하지만 언론은 ‘맹탕’이라고 폄하했다. 지금 지도부의 성격을 고려하면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원인’을 회피하면 다음에도 같은 패착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돌아오는 ‘4.7 재·보궐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틀린 처방을 반복하면 결국 패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원내교섭단체 유일 야당은 뿔뿔이 공중 분해될 수도 있다.
--- p.7~10, 「저자 머리말」 중에서

나 : 당이 출간한 백서에서 ‘황교안 책임론’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책임 떠넘기기’라는 지적도 있는데 억울한 부분은 없나?
황 : 나는 패배한 장수다. 할 말이 없다. ‘제가 죄인’이라는 말씀으로 대신하겠다. 패배를 통해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많이 깨닫고 배웠다. 나는 ‘섬김의 리더십’을 추구했다. 높고 강력한 리더십보다는 ‘협치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결과는 실패였다. 내가 가진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엔 경험과 스킬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섬김의 리더십’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괜히 ‘공복(公僕)’이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잘 맞지 않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계속해나가야 한다. 지금 기성 정치권 분들과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향후 정치지도자들은 이 부분에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 같다.

나 : 대표님이 진단하는 진짜 패배원인은 뭔가? 객관적으로 설명해 달라.
황 : 당에서 발간한 백서 자체는 일리 있으나 그것이 전부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먼저 ‘막말’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기본적으로 〈국민의힘〉을 지지해왔던 분들께서는 ‘특정 정파에 편향되었다’라고 보기보다 애국심이 기본적인 동기였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분들을 전부 ‘극우 프레임’이나 ‘막말 대상자’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막말 때문에 졌다’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전부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공천’은 실패했다. 다만, 이번 공천에서 지난날 반복되었던 비리와 당 대표의 일방주의공천 등으로 인한 부작용은 최소화됐다고 생각한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다. 특히 “‘통합’을 이루고 좋은 공천을 통해 승리하고자 하는 것”이 당시 대표인 내가 지향했던 ‘이기는 공천’이었다. 그런 뜻을 가지고 공관위를 구성하고 나름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공천은 실패했다. 그래도 당 대표의 전권을 내려놓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앙당의 전략 부재’에 대해선 인정한다. 민부론(국민을 부자 만들자는 경제 대안), 민평론(국민 중심 평화 대안), 민교론(국민 중심 교육 대안) 등 평소에 우리 당에서 정책 대안을 마련해오긴 했지만, 선거 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압축적이고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탄핵에 관한 입장 표명’의 경우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그 문제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이 옳다고 생각했다. ‘탄핵’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분열이 야기되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국가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분열적 요소에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 정권의 폭주를 막기 위해 자유민주진영은 미래와 단합에 집중해야 했다.
‘청년층의 외면’은 뼈아팠다. 이들의 자유민주진영에 대한 지지율은 15%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필요와 바람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들어 내고 당의 운영방식 역시 시대정신에 맞는 형태로 개선해 나간다면, 이러한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총선 당시 나에게 다가온 수많은 청년을 보면서 희망의 기운을 느꼈다. 그런 맥락에서 더 쇄신하고, 청년들의 수요에 맞는 정책과 당 운영방식을 지속해서 실행에 옮겨야 했는데 아쉽다.
--- p.33~36, 「총선 패배 원인」 중에서

나 : 아까 공천이 잘못됐다고 하셨다. 공관위와의 갈등 때문인가?
황 : 내가 처음 당에 들어왔을 때, 한국당이 직면한 가장 큰 비판이 ‘싸움을 못한다.’, ‘대안이 없다.’, 그리고 ‘미래가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싸워 이기는 정당’, ‘역량 있는 대안 정당’,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당’ 등을 목표로 삼았다. 문제는 내가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최고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상기 목표들을 함께 이룰 수 있는 ‘협치 모델’을 연구했다. 예를 들면 광화문 투쟁을 진행하는 동시에, 경제적 대안을 민부론등을 통해 출판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현장·학계 전문가들을 초빙했다. 그 외에도 안보, 교육 등 여러 대안을 연이어 만들었다. 당내의 인재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2019년 6월부터 인재영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어져서 결국은 공천에만 매몰된 인재영입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공천 외에도 당 내외 혁신을 이룰 수 있는 ‘포괄적 인재영입’을 추구했었다. 특히 당내 의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 인재들을 추천받았다. 총선준비단도 경험 있는 의원들과 뜻을 모아 오래전부터 출범시켰고, 준비도 착실히 했었다. 공관위 역시 제왕적 당 대표의 무분별한 공천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조직을 추구했다. 하지만공관위가 처음 내 구상과 다른 길로 간 부분은 많다. 최선을 다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하지만 책임을 미루려는 뜻은 전혀 없다. 역시 최종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나 : 마지막 공천의 정정은 약속했던 ‘공관위 독립성’을 침해한 것 아닌가?
황 : 권한을 분명히 주었지만, 대표인 나도 당헌·당규의 범위를 넘는 정도의 권한을 줄 수 없다. 공천과정에서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특히 마지막 몇 자리의 경우, 당헌·당규상 명백히 위배되는 내용이 있었다. 통념상 받아들이기 힘든 지역과 후보들이어서 당헌·당규에 따라 최고위를 통해 바로 잡은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마찰에 대해서는 내 잘못이 없지 않다. 전반적으로 10여 곳이 문제가 있는 지역으로 분류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최고위원회의 정당한 권한을 활용해 최소한의 조치를 했고, 여기에 대해선 국민께서도 양해를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 총선 이후 김형오 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나?
황 : 만난 적 없다. 총선 선거전 진행 중 만난 일은 있지만…

나 : 김형오 위원장과 선거가 한참 지난 후 신동아 인터뷰를 했다. 보셨나? ‘내부에 적이 있었다’라는 내용이 주던데,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황 : 봤다. 그런데 면밀하게 따져 본 것은 아니다. 굳이 시시비비 가리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함께 고생했던 분인데, 인터뷰하신 내용을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나 : 김형오 위원장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공천자료로서 ‘위원장 평가지침서’에 대한 생각은?
황 : 총선준비단에서 많은 내용이 검토되고 논의됐다. 정량·정성 평가의 기준, 평가 주체의 객관성 등 여러 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했다. 2019년 6월부터 총선준비단은 제기될 수 있는 여러 이슈를 광범위하게 정리했고, 공관위에도 결과와 기준들을 종합적으로 전달했다. 그것을 공관위가 받아들여 활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나 : 김형오 위원장 인터뷰에서 언급된 ‘김종인 책임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황 :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져야 한다. 물론 김종인 위원장이 나와 함께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으셨기 때문에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도 같이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내가 당 대표를 겸해 맡았기 때문에 내 잘못이 절대적으로 크다.

나 : 김형오 위원장은 태영호 의원을 공천하고 그를 중심으로 별도의 유세단을 만들려고 했는데 김종인 위원장이 비토를 놓으면서 유세단 자체가 수포가 되었다며 아쉬움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부연해 설명할 것이 있나?
황 : 처음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하려 했을 때, 강남(갑) 공천이 잘못되었다며 변경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셨다. 거기에 대해 내가 반대하니까, ‘당에 들어와서 할 역할이 없다’라고 하시더라. 그러나 공천 결정은 공관위에 위임했고, 실제 최종공천까지 이뤄진 마당에 그걸 되돌린다는 것은 공정성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국 그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태영호 의원이 강남갑 국회의원이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팩트는 거기까지다. 지금 시점에 다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p.39~42, 「공천실패 - 개관」 중에서

나 : 김형오 공관위원장과의 첫 접촉은 어떠했고, 어떤 약속을 했는가?
황 : 대표가 된 이후 계속 ‘총선 승리의 핵심’은 공천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런 만큼 좋은 공관위원장과 공관위원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이전의 총선준비단과 인재영입위 활동 등으로 그림이 갖춰진 10월 즈음부터 공관위원장 인선을 위해 여러 사람과 두루 만났다. 총선 승리를 위해 ‘공천 혁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내 개인적인 인연과 상관없이 다양하게 접촉했다. 초기에는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많이들 고사하셨다. 고사한 분 중 여당에 가시거나 선거 방송에 출연하시기도 하더라. 12월 4일에는 공개적으로 ‘공천관리위원장 국민추천’을 받았고, 그 결과 공관위원장 추천을 수합했다. 그때 내가 ‘비움을 통해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같은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공천 혁신을 통해 총선 승리를 이뤄내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거기에 맞는 공관위원장을 영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많은 추천과 논의 끝에 결국 ‘우리 당 출신 국회의장 중 한 분을 모시자’라는 의견으로 수렴되었다. 당내 논의를 통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공관위원장으로 모시자는 쪽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인 9월 15일에 김형오 위원장을 뵈었는데, 소장품 기증자로 국회 특별전시회를 여셨을 때였다. 전반적으로 이미지나 평판이 좋았다. 2020년 1월 초 공관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드리려 처음 연락을 드렸는데, 그때는 베트남에 계셨다. 처음 들었을 때는 고사하셨는데, 지속적으로 권유했고 고민 끝에 수락하셨다. 그분이 제시한 조건은 공관위원회 구성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 재량으로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해 드렸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공천의 취지나 원칙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해 드렸다.

나 : 공관위원 구성은 누구와 논의했는지 혹시 아는가?
황 : 재량을 드렸기 때문에 나는 구성에 관여치 않았다. 김형오 위원장께서 단독으로 구성 했다.

나 : 원래 김형오 위원장과는 잘 아는 사이였나?
황 : 원래는 박관용 의장님과 제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박관용, 정의화, 김형오 세 분의 전직 의장 중에서 어쩌면 김형오 의장과의 인연이 가장 적었다. 사천(私薦)을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멋쩍게 웃으며) 다른 분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라 생각했지만, 역차별을 당하신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하실 생각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 :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안전장치는 있었나?
황 : 안전장치는 당헌·당규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국민공천배심원단’이었다. 공관위에서 결정된 후보를 ‘배심원단 3분의 2’ 이상 동의를 통해 제청하면 최고위가 거부할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지난 20대총선 ‘막장 공천’을 교훈 삼아 뒤늦게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였다. 다만 그 배심원단 구성을 공관위가 요구하도록 되어있기는 하더라. 정작 공관위는 줄기차게 ‘배심원단’ 조항을 당헌·당규에서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당헌·당규를 바꾸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최고위가 의결하는 절차를 밟기 때문에 따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한국당의 당헌·당규는 공천에 문제가 있어 바로잡으려면 최고위에서 하면 되는 구조였다. 당헌·당규에 의한 정당한 정정이 나중에 ‘뒤집기, 사천’ 논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 : 보통 내부논의의 안전장치 역할을 사무총장이 한다. 당시 박완수 사무총장은 초선이고 당 경험이 많지 않아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알고 있었나?
황 : 박 총장이 총선준비단부터 함께했고 공관위까지 합류했었다. 그래서 믿었다. 하지만 ‘인해전술’에 밀려 결국 힘을 못 쓴 것 같다. 실력 발휘를 할 상황이 안됐다. 당의 일에는 다른 분야에서의 경력보다 국회의원 선수와 당무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실감했다.

나 : 김형오 위원장은 취임 초부터 대폭적인 ‘물갈이’ 선언을 했는데, 사전에 그 폭과 대상에 대한 공감은 있었나?
황 : 총선준비단을 운영하면서 여러 기준이 논의됐다. 내가 제시한 기준은 △ ‘이기는 공천’, △ ‘공정한 공천’, △ ‘경제 살리는 공천, △‘혁신 공천’이 큰 틀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세세한 기준들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뻔한 이야기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다. ‘혁신 공천’은 무난히 이길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시행하자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다. 가령 TK, PK 같은 지역이 자연스럽게 그 대상이 되었다. 수도권 등 박빙 지역의 경우, ‘이길 수 있는 공천’을 기준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다. 이 모두 공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결과적으로 피해 보신 모든 분에 대해서는 거듭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중략)
나 : 2월부터 TK, PK 공천에 들어가면서 ‘물갈이’가 본격화됐다. 이를‘낙동강 벨트 전략’이라고 했다. ‘낙동강 벨트 전략’이 무엇이었나?
황 : ‘낙동강 벨트’는 전통적으로 우리 당 지지기반이 강한 지역이라 ‘혁신공천’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부·울·경의 경우 양상이 좀 달랐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 많았다. 따라서 ‘이기는 공천’을 병행하는 컨셉으로 진행했다. 그 결과 53개 선거구에서 20대 총선 때는 40곳이 승리한 것에 비해 21대는 45곳에서 승리했다.

나 : 김형오 위원장과 김세연 위원이 부산 출신이다. PK 지역 잘 아는 분들임에도 그 지역 공천과정이 굉장히 요란스러웠다. 이들에 의한 사천(私薦)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김형오 위원장은 ‘혁신공천’과 ‘이기는 공천’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황 : 나와 당에서 정한 기준에 전반적으로 동의했다. ‘혁신공천’은 어느 정도 되었는데, ‘이기는 공천’이 잘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가령 특정 지역에서 컷오프된 인물들을 급작스레 다른 지역으로 출마시키는 방식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재배치 관련 논의도 있었고 내가 우려도 표명했지만, 정작 실행은 김형오 위원장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 : 우려를 표했음에도 왜 그때 바로 정정하지 않았나?
황 : 권한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기회를 준 것이었다. 내가 바로 정정해버리면 사실상 공관위원회 독립성을 나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제어가 되지 않을 때까지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민감한 지역 대부분은 뒤로 밀려있었고, 거의 끝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막판에 진통을 겪은 이유다.

나 : 김형오 위원장 사퇴 후 공관위의 누구와 소통했나?
황 : 이전 김형오 위원장 때는 위원장님과 내가 직접 소통했다. 하지만, 이석연 대행으로 갔을 때는 사무총장이 중심이 되어 소통했다. 그런데 그때의 공관위원회는 이미 당 기구와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대로 없는 상황에서 결국 막판에 그런 불통 요소들이 터져 나왔다.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나 : 부산의 경우 권력투쟁의 양상이 있었다. 이언주 의원의 경우 부산영도(영도는 김형오 의원이 5선을 한 이후 김무성 의원이 이어받은 지역이다)를 희망했는데, 처음엔 김형오 위원장이 전략공천을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중에 김무성 의원의 반발로 ‘통합 잉크도 마르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통합의 책임자로서 조율을 하지 않았나?
황 : 공천 갈등은 늘 있었다. 초창기에는 언론 보도와 달리 ‘그렇게 심각한 현안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추후 과정을 봐도 실상이 그랬다. 실제로 갈등이 표면화되기는 했지만, 당사자(이언주 후보)는 다른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재배치되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유형의 갈등과 시행착오는 모든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 : PK는 불출마 선언이 굉장히 많았던 반면, TK는 상대적으로 불출마 선언이 거의 없었다. 경북 안동 출신 김광림 최고위원이 불출마선언을 하며 분위기를 선도했는데 배경이 있었나?
황 : 보통 PK는 불출마가 많고 TK는 적다고 했는데, 일단 ‘다선의원’들이 용퇴를 하는 분위기가 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다선의원이 많은 PK에 불출마 선언이 쏠려있었던 것뿐이다. 실제로 TK는 3선 이상 의원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희소했던 TK 다선의원 중 김광림 의원과 강석호 의원이 자진해서 빠지겠다고 한 거다. 김광림 의원의 경우, 일에 대한 의욕이 상당히 많으신 분이기에 인상적이었다. 김형오 위원장의 권유를 받고 선선히 의원직을 내려놓으셨다. 공천과정에서 그분이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할 만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히 받아들이시더라. 실제로 불출마 선언 이후에도 당의 여러 가지 역할들을 요청드렸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수락해주셨다. 이분께 정말로 감사했고, 나중에 꼭 다시 중요한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 싶었다. 예를 들면, 우리 정부 통계청에서 고용관련 지표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김광림 최고위원 한 사람만이 해당 통계의 맹점을 딱 뽑아내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하시더라. 경험과 연륜에서 나온 그 분석 능력이 아주 예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정말 변함없이 노력하시는 분이다. 지금 계신 퇴계 연구원도 지원 없이 봉사하는 자리라고 들었다.

나 : 당시 기사를 보니, 공천 분위기도 새보수당 계에서 리드한 것으로 나오더라. 예를 들면, 이준석 최고위원이 ‘분홍 옷만 입으면 뭐하냐’면서 ‘중진들 영남 불출마 후 수도권 출마’를 강권했던데, 이런 압박은 새보수당 출신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최고위의 이준석 최고위원, 공관위의 김세연 위원, 외곽지원 유승민과 정병국 의원 등의 활약이 컸다. 이때 대표는 어디 계셨는가?
황 : 그런 언론 보도는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준석 최고위원 발언만으로 특정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전혀 아니다. 불출마 권유 작업은 다각도로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일부의 목소리가 새보수당 출신들을 통해 (언론에) 표출되면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개인적인 아픔에도 불구하고 불출마 선언에 동참해 주신 분이 많다. 실제 불출마 선언을 한 한 분 한 분을 생각해 보면 안타깝다. 결과가 더 좋았어야 그분들의 희생이 빛을 발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각나는 분들이 많다. 정갑윤 의원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많은 정무적 조언을 해 주셨다. 이주영 의원은 공직생활 선후배 인연으로 많이 의지했고, 유기준 의원은 같은 국무위원 출신으로 정치적 조언자를 마다치 않으셨다. 여상규 의원은 마지막까지 법사위원장 역할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해 주셨기에 아직도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김성찬 의원도 선언은 나중에 했지만, 일찍이 불출마 결심을 해 주셨다. 중앙위 위원장이던 정종섭 의원도 당원 교육 아이디어 등을 제시하고 실행하신 능력자셨다. 최교일 의원은 법률지원단을 대폭 늘려 30여 명에서 200명까지 확충해 야당으로서 법률 수요를 맞춰주셨다. 변호사뿐 아니라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등을 모집하여 광범위한 기여를 해 주셨다. 이분들 한 분 한 분은 불출마 이후에도 미래통합당을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 주셨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 희생이 안타깝고 고맙다.

나 : 좋아할 질문이 아닐 수도 있어 조심스럽게 묻겠다. ‘불출마 릴레이’ 속에서도 그 빈자리를 채운 분들이 틀림없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이 공교롭게도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새보수당 출신이란 이야기가 많다. 지금도 불출마 선언을 한 분들이 이런 불만을 갖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래서 언론에 확인해 보니, 당시에도 ‘유승민계는 본인 계파 챙기기에 혈안 돼 있다’는 불만의 소리가 있었더라. 지금도 당내 요직 중 상당수를 그분들이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황 : 얘기는 들었다. 특히 통합과정에서 새롭게 들어오신 분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회를 부여해 준 것이 아니냐는 피드백에 대해서는 그런 심정을 겸허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당시는 통합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대승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씀드린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나 : 김형오 위원장과 세력 안배에 관해 대화하지 않았나?
황 : 공정한 공천에 관해 얘기했고, 편중되지 않도록 당부도 했다. 이후 중간중간에도 불균형 이슈가 나올 때마다 지속적으로 피드백 보냈다. 나는 원칙적으로 계파와 상관없이 두루두루 사람을 챙기려고 노력했다. ‘친박만 챙긴다’는 말들을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나 스스로 먼저 내려놓는다고 선언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어떤 세력을 특별히 챙겼다면 지금의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 공천 전략엔 지역마다 포석이 될 키맨(Key man)들이 있다. 그 중한 분이 김병준 위원장이었다. 세종을 공천은 좀 ‘뜬금없다’라는 평가가 많았다. 세종시 내에서도 공무원들이 많은 청사 쪽이 아니라 원주민이 많이 사는 지역에 공천을 받았다. 대구를 말렸으면 수도권의 상징적인 지역을 주면 좋지 않았나?
황 : 특별히 누구를 어디에 배치하느냐의 문제는 ‘사후보고’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눴다. 김병준 위원장의 경우 서울 쪽으로 구상하고 뜻을 전했는데, 정작 나중에 알고 보니 세종에 배치되었더라. 난 애초에 서울에 출마하셔서 바람을 일으키는 역할을 기대했었는데,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되어서 여러모로 아쉬웠다. 김태호 의원에 관하여서는 나 역시 (다른 지역) 출마를 권유했는데, 생각대로 잘 진척되지 않았다. 홍준표 의원의 경우 당내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많아 놀랐다.
(중략)
나 :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나?
황 : 공천에 문제는 확실히 있었다. 그걸 인정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결론은 다 내 책임이란 사실이다. 다시 돌이킬 수 있다면,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부여된 권한까지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국민 앞에 진정성을 보이면 국민께서 그 부분을 알아주시지 않을까?

나 : 공천에 대한 마지막 소회가 있다면?
황 : 거듭 말하지만 모두 다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시시비비할 일이 아니다. 지금 의석수가 부족한 것도 내 책임이다. 역대 최대 득표인 1,190만 표 득표는 후보들과 당원들의 공이다. 잘 된 공천을 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늘 있다. 그때는 스스로 욕심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것이 혁신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국민도 알아주실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이 달랐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성과로 연결 짓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죄스럽게 생각한다.
--- p.212~227, 「공천실패 - 김형오 공관위원장, 공관위 관련」 중에서

황 : 나는 과거의 구태정치를 넘어 새로운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는 ‘개인의 역량’이나 ‘적재적소 배치’ 그리고 ‘개혁적 인사’ 등의 기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인사를 결정했다. 당시 나는 유권자 입장과 정치인 입장 중에서, 유권자 입장 중심으로 모든 사안에 접근했다. 일종의 ‘수요자 중심주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만으로는 안됐다. 정치인의 본질을 뒤늦게 알게 됐다.
‘공정한 인사’에 주력하느라, 정작 나를 도와준 분들에게 도움보다는 어려움을 주게 되어서 아쉽고 안타깝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그 이후 내게 와 닿았다. 도와주신 분들을 충분히 챙겨보지 못했던 점은 내가 한없이 부족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아픈 증거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 : ‘전문가를 기용했다’라고 하셨는데 누가 전문가였나?
황 : 나는 입당 초부터 ‘통합’과 ‘대여 투쟁’, ‘정책 대안’, ‘미래 준비’를 강조했고, 그 이상에 적합한 분들을 모셨고 상당한 권한을 드렸다. 분야별로 보면 이렇다.
‘미래’를 담당했던 분은 김기현 의원, 김종석 전 의원이었다. 김기현 의원은 정책위의장 출신답게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으셨고 열정적이셨다. 김종석 전 의원은 여의도연구원 원장답게 매우 학구적이고 다양한 식견을 가지고 계셨다. 김 전 의원은 경제대전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셨다. 두 분 모두 어떤 특정한 도그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 었다.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대안’ 전문가는 김광림 전 의원, 김재원 전 의원, 추경호 의원 등이다. 김광림 의원은 최고위원으로 경제대전환위원장을 맡아 〈징비록〉과 〈민부론〉 만드는 책임을 훌륭히 완수해 주셨다. 김재원 의원도 정책위의장으로 많은 활약을 해 주셨다. 특히 추경호 의원에 대해서는 나와 개인적인 인연을 많이 이야기하시는데, 나는 대체로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추 의원은 나와의 인연 때문에 오히려 능력보다 평가절하되신 분이다.
처음에 대표를 맡았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야당이 싸울 줄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계속 ‘세게 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래서 투쟁을 많이 했다. 그 중심에 박대출 의원과 민경욱 전 의원이 있었다. 민경욱 전 의원은 내가 기념행사에 갔다가 물세례를 받았을 때 온몸으로 막아줬다. 박대출 의원은 상임위에서 정책 대안으로 잘 싸워줬고 거리에서도 용감했다. 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청와대 앞에서 단식투쟁을 할 때, 마치 관운장같이 항상 내 앞을 지켜준 것이다. 어려울 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통합’ 과정은 원유철 전 의원, 김상훈 의원, 홍철호 전 의원 등이 맡아 주셨다. 원유철 전 의원은 통합에 가장 큰 역할을 해주셨고, 총선 때 미래한국당 대표까지 맡아 주셨다. 김상훈 의원은 최근 4·7 재·보궐선거 경선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잘해주실 줄 믿는다. 홍철호 전 의원도 통합과정에서 매개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셨다.

나 : 쟁점이 됐던 당직, 사람 등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인선이 있다면?
황 : 역시 김세연 여의도연구원장이다. 임명할 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정말 많은 말을 들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밀어붙였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분이 여연원장을 하고 있을 때 보건복지위원장까지 맡았다. 중요 당직을 복수(보건복지위원장, 부산시당위원장, 여의도연구원장)로 맡는 것이 옳지 않다는 비판이 많았다. 당 대표로 곤혹스러웠다. 직접 만나서 이런 분위기를 전했더니 부산시당위원장은 곧 임기가 끝난다고 하며, 본인이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면담 후 본인 의사를 존중하여 겸직을 허락해주었다. 통합이란 차원에서 결이 좀 다르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당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해 논란이 됐다. 또 공천과정에도 구설이 많았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황 : 가정으로 이야기하긴 힘들다. 나는 ‘여연은 정치를 잘 아는 외부 전문가가 맡는 것이 좋다’는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이후 (김세연 원장이) 그만두자 정치권에 밝은 학자인 성동규 교수를 원장을 임명했다. 성 교수는 공천에 공을 들이기보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려 애쓰셨다. ‘시간을 좀 더 충분히 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 p.92~940, 「당직 인사의 어려움」 중에서

나 : 노무현 대통령의 ‘통합’과 ‘나라 사랑 정신’을 깊이 기억하겠다고 했는데, 문 대통령과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황 : 저는 ‘통합’을 강조하며 대표가 되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분을 찾아뵈었다. 지금 문재인 정부와 비교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 새삼 알게 된다.

나 : 그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차이는 뭔가?
황 :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 간에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떠나 본질적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들자면 한도 없다. 정치적으로는 ‘협치’, 원전 정책 등 산업정책, 파병 문제 등 대외정책 등이 본질에서 다르다. 거의 국정 전반에서 ‘극과 극’이다. 대통령 개인의 국정 스타일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노 대통령은 욕을 먹더라도 당당히 국민 앞에 나섰다. 문 대통령은 중요한 문제에 숨어만 있다. 책임지는 자리엔 서지 않고 광내는 자리만 등장한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문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중략)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나라에 위해를 가할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제어능력을 발휘했다. 본인 진영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한미FTA 체결’과 ‘해외파병’(자이툰 부대) 등을 강단 있게 추진한 것이 그런 경우다. 국정운영에 있어 정치적 사익보다 국익에 부합되는 선택을 이어나가셨던 분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정반대다. 기본적으로 (잘못으로 판명된 의사결정에 대해)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 p.84~85, 「문재인대통령과의 인연 - 봉하마을 방문, 노무현 전대통령과 문재인대통령 비교」 중에서

나 : 당시 ‘봉하마을 방문’ 기사에 보니 노무현 정부 시절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는 내용이 있던데, 진상이 어떻게 되나? 블랙리스트 아닌가?
황 : 블랙리스트 이상이었다. 나에 대한 파일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있었다고 들었다. 2006년도 초 검사장 인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검사장 승진 1순위가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였다. 3명의 차장 중, 2차장 제외하고 제1, 제3차장이 승진했다. 그 불운의 2차장이 바로 나다. 당시는 의아하고 실망스러워서 옷을 벗을 생각도 했다. 한참 후에야 지인에게 ‘청와대 블랙리스트’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에 ‘황교안은 안 된다’라는 근거자료로 별도의 파일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부적격 사유는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라고 했다. 경찰에서 수사가 한창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수사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후 검찰로 이첩되어 살펴보니 ‘6.25는 통일 전쟁’이라고 한 부분과 전후의 행적을 볼 때 명확한 법 위반이었다. 수사팀이 구속기소를 강력히 주장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어서 검찰 수뇌부도 구속기소를 건의했고 당시 김종빈 검찰총장도 이에 동의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기에 즉시 법무부에 보고했고,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구속하지 말라’는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추미애 장관에 의해 남발되고는 있지만, 이때가 헌정사상 최초의 수사지휘권 발동이었다. 결국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법적 권한 행사를 수용하고, 본인이 이 모든 상황을 책임지겠다며 사퇴했다. 그 결과 강정구 교수 사건은 불구속 기소로 마무리됐다. 이것이 나에 대한 인사보복의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는 결국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다.
두 번째는 ‘국정원 도청 사건’ 문제였다. 지금은 조직 자체가 사라져서 말할 수 있지만, ‘국정원 8국’이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수사팀은 관련자 전원을 구속,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나는 국정원의 경직된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실적으로 ‘지시 불이행’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물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원장 두 사람과 차장 한 사람만을 구속하는 방향으로 내부결정을 조정했다. 이를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대통령께 보고했다. 그런데 구속 대상인 임동원 원장이 김대중 대통령 측근이었기 때문에 청와대와 (이해찬) 총리실에서 강력히 반발했다. 그런데도 원칙에 따라 그대로 밀어붙여 구속했다. 이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두 사건 모두 그 중심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 때는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이었고, 두 번째 사건 때는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내가 검사장 승진에서 누락된 것은 진보진영 언론매체도 ‘부당하다’라는 사설을 쓸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들은 내가 책임자로 직접 143회 언론브리핑을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참고로, 이후 천신만고 끝에 정권이 바뀐 후 검사장 승진을 했고, 그 후 2011년 부산고검장으로 부임했을 때 문재인 당시 변호사에게 인사 전화를 했다. 내게 인사 불이익을 준 분이지만 말이다.
--- p.86~88, 「문재인대통령과의 인연 - 노무현정부 ‘인사불이익’, 블랙리스트?」 중에서

나 : 당시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한참 전인데, 그때도 현장은 그리심각했나?
황 : 분명히 말하지만, ‘코로나 19’ 이전에도 우리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 팬데믹(pandemic) 이전부터 우리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박한 상황(경제 파탄)이었다. 정치가 엉망이었다 해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내가 정치할 각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 보면 오히려 ‘코로나 19’가 현 정권에게는 구세주가 됐다. 온갖 실정을 가려줬고, 면죄부까지 주었다. 실정을 감춰주고, 돈을 풀 핑계를 만들어 주지 않았나. 남대문 시장 현장에서 새벽을 깨우는 분들을 봤다. 가게는 상당 부분이 닫혀 있었다. 그곳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라며 일찍 나오신 분들을 보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상당수 상인이 내가 손을 잡았을 때 ‘살려달라’고 했다. ‘못 살겠다 바꿔 달라’는 얘기도 했다. 이미 익숙한 말이었지만 과거와 달리 생생하게 마음에 꽂혔다. 들을 당시는 분통이 터졌고, 지금은 송구스럽다.
--- p.79, 「문재인대통령과의 인연 -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평가」 중에서

나 : 패러디 분위기를 타며 대표의 리더십이 강화되고, 조국에 대한 혐오가 확산하는 와중에 대규모 집회로 이어졌다. 결국,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했는데, 선배 장관으로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황 : 후배라고 하니 당혹스럽다. 이런 장관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국은 대략 35일 정도 장관직에 있었다. 그동안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으로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재임 기간 내내 의혹 제기를 받고 국민과 싸우기만 했다. 남 탓, 거짓말, 내로남불 등으로 점철된 행태로 국민과 싸운 법무부 장관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후임(추미애 장관)이 더한 것 같아 안타깝다.

나 : 인성에 대한 평가는?
황 : 장관 지명되기 전에도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노맹 사건’ 등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당시 운동권 단체 중에서도 가장 위험도가 높은 조직의 일원이었다. 나중에 본색이 드러나지 않았나. 이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파괴자나 위선자이다. 조국은 ‘위선적인 혁명가’다.
(중략)
나 : 조국에 이어 추미애 장관이 취임했다. 그런데 현재 검찰과의 갈등이 최고조다. 추 장관을 평가한다면?
황 : 평가하기 싫다. 조국과 마찬가지로 정말 평가하기도 싫다. 조국은 대한민국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고, 추미애는 법치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점에선 공통적이지만 개별적인 성격은 좀 다르다. 추 장관의 경우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말도 안 되는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
집중적인 전문역량을 갖춘 분이 장관이 되어야 하는 부서가 대표적으로 법무부와 외교부다. 추 장관 이전에도 판사 출신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대체로 그런 분들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며 업무수행을 잘해주셨다. 노무현 정권 때도 판사 출신 장관이 있었다. 처음에는 개혁을 내세웠지만, 이내 검찰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업무수행을 무난하게 하셨다. 현 정권에서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법무부 장관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추미애 장관은 조국이 질러놓은 불에 기름을 부은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나 : 추미애 장관 향후 거취 어떻게 될 것이라고 봄?
황 : 물러나게 되겠지만 사실상 쫓겨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얼마 오래 못 갈 것이다.
--- p.132~134, 「조국, 추미애 전장관 평가」 중에서

나 :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사태를 계기로 대통령과 소원해졌다. 검찰 선배로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황 : 검찰조직은 민주주의 제도의 중요한 축이다. 검찰 제도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로 탄생했다. 당시 만연했던 법원과 경찰의 부패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된 조직이다. ‘가장 정의로운 조직’이라고 몽테스키외가 말할 정도였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 뜻에 어긋난 검찰의 결정도 있었고 국민의 비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무너진다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윤석열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의 지속적 핍박에도 불구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윤 총장은 강단 있는 사람이다. 우리 국민께서도 응원해 주시길 바란다.

나 : ‘정치인 윤석열’은 어떤가?
황 : 현재는 정치인이 아닌 법조인이다. 그것도 특수통 검사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 있던지 윤 총장이 우리나라의 한 축으로서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 p.133,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생각」 중에서

나 : 요즘 가장 핫한 인물이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마지막으로 검찰 선배로서 윤석열 총장에 대해 충고해 줄 말씀이 있는가?
황 :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 그 당연한 귀결을 입증하기 바라며, 힘내라고 응원을 하고 있다. 안 그럴 줄 알지만, 현재의 위기에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용기를 내고 ‘반드시 정의를 세워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 : 예전에도 물었지만 다시 묻겠다. ‘정치인 윤석열’에 대한 생각은?
황 : 윤석열은 현직 검찰총장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하지만 태생적인 정치인은 없다. 필요할 때 여러 이야기를 듣고 준비를 하면 누구라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정치권 경험이 전무(全無)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 또한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 : 어려움을 겪는다면 도움을 주실 계획인가?
황 : 물론이다. 우리 모두 나라를 지키는 것이 ‘제1의 목표’다.
--- p.271~272,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생각」 중에서

나 : 입당 때부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혁신과 통합’을 강조했다. “미스터 통합”이라 불릴 만하다. 왜 그리 ‘통합’이 중요했나?
황 : 입당을 고민할 때부터, 이 정권의 실정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 ‘통합’이라고 봤다. 총리 재직 시절 새누리당이 참패하는 것을 봤는데, 특히 서울에서는 ‘삼 분의 일’밖에 수성 못 했고, 대구·경북 지역마저 일부 지역구를 뺏기기까지 했다. 이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도 모두 졌다. 나는 ‘내부분열’을 핵심 원인이라 보았다. 가령 지난 대선 때만 해도 그랬다. 홍준표 후보가 24%, 안철수 후보는 21%, 유승민 후보도 6%를 얻었는데, 이 표를 모두 합쳤으면 과반이 넘는다. 표로만 보면 이길 수 있는 선거였다.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그만큼 통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당 후 첫 메시지로 ‘통합’을 언급했던 것이다. 1단계는 ‘당내 통합’이라 생각했다. 이는 곧 당내 계파나 파벌을 청산하는 것이다. 내가 입당한 이후 3~4개월이 지나면서 친박과 비박으로 나뉜 싸움은 잠잠해졌다. 2단계가 ‘자유민주진영통합’이었다. 역사상 자유진영통합은 작게는 3번, 크게는 4번 있었다. 첫 번째가 ‘삼당합당’이었고, 두 번째는 1997년도 (꼬마)민주당과 합당한 한나라당의 탄생이었다. 이후 2012년에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합하여 새누리당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합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정체성으로 국민에게 제대로 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나 : 본격적으로 통합작업이 시작된 시기는 언제인가?
황 : 5월 말쯤이었다. 출발부터가 녹록지 않았다.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민주진영의 대통합이었다. 바른미래당, 우리공화당, 전진당, ‘자유와 공정’, 서경석 목사가 주도한 단체와 여러 주체로 구성된 시민단체, 박형준 위원장이 주축이 되는 세력 등이 구체적인 대상이었다.
‘민생투쟁 대장정’이 끝나가는 2019년 5월 31일쯤부터 구체적인 통합논의가 시작되었다. 민생투쟁 대장정 과정 중 박형준 위원장을 만나 논의를 시작했다. 통합논의를 위해 조찬을 했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문제는 우리 당이 직접 나서면 ‘지분싸움’ 등이 불거질 수 있어 통합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당이 주도하기보다는, ‘제3지대’가 주도하고 우리가 합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대화를 나눴다. 이후 매달 만나 논의를 지속했다.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과정을 체크했는데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때 통합팀은 유승민 대표와 대리인들을 모두 만났고, 안철수 대표의 대리인들도 접촉했다. 그 외에도 내가 사람들 도움을 받아 우리공화당과도 협력 논의를 했고, 이언주 전진당 대표도 직접 만났다. 원희룡 지사도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해 줬다. 이렇게 6월에서 8월 정도까지 3개월간 비공개 물밑대화를 죽 이어 진행했다.
한국당이 제1야당이기는 하지만, ‘제3지대를 중심으로 준비하자’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통합추진위(통추위)’를 만들어서 이견을 조율했다. 통추위 출범이 어려웠던 만큼 이후는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당 대표급 인물들이었다. 유승민 대표는 통합준비과정에서 계속 전화 통화로 논의를 진행했다. 직접 만나 지속적으로 논의한 분들은 박형준 위원장과 원희룡 지사 같은 분들이었다. 유승민 대표 대리인은 지상욱 의원이었고, 안철수 대표 입장은 정병국 대표가 대신 전했다. 또 안 대표의 비서실장 역할을 이태규 의원이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우리 측 입장은 박형준 위원장을 통해 전달했다.
11월 6일에 공식적으로 ‘대통합’을 제안했고 화답을 받았다. 이때는 권영세 의원이 유승민 대표와 대화가 되어서 일을 많이 했고, 원희룡 지사도 대화 채널을 유지하며 거들었다. 참고로 원유철 의원이 원희룡 지사 측과 대화창구가 되기로 했다. 김선동 의원도 물밑 역할을 했고, 주호영 원내대표, 홍철호 의원, 이양수 의원 등도 통합과정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동원했다.

나 : 대통합 공식제안과 통추위 출범 이후 상황은 어떠했는가?
황 : 물밑 대화할 때에는 잡음이 없었는데, 공식적으로 오픈한 이후 난관이 본격화되었다. 문제는 각 단위의 대표들은 뜻을 모았는데, 참모들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가령 11월 6일 이후 공개대화를 하자고 해서 유승민 대표와 통화를 시작했고, 이견 없이 얘기가 잘 진행됐다. 첫째 대화는 유승민 대표가 보안 유지를 요청했고, 두 번째는 그런 요청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보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협상 채널에 있었던 당 대화 책임자에게 ‘보안을 유지하라’고 지시까지 했다. 그런데 오전 회의의 내용이 오후에 보도된 것이다. 깜짝 놀라서 유승민 대표에게 전화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고 서운해하는 문자가 왔다. 그 이후 한 달가량 시간이 흘러갔다. 이후 원희룡 지사가 중재 역할을 해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이것이 대통합과정에서 벌어졌던 첫 번째 오해다.
이후 두 번째 난관은 유승민 대표 측이 통합한다고 해놓고, 급작스레 〈새로운 보수당〉을 만든 사건이었다. 경위를 알려달라고 하니 명확한 대답을 안 해줬다. 새로운 당을 만든다는 것은 ‘통합보다는 나름의 새 길을 가겠다’라는 것 아닌가? 진위를 물어봤음에도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우리대로 다른 그룹들과 통합을 계속 진행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게 또 문제가 되더라. 새보수당이 전체 일정에 발맞추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으니까, 우리는 우리공화당을 포함한 다른 대상들을 고려해 개문발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을 향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니 이후에는 잘 마무리되었다. 다른 그룹들의 우려와 달리 새보수당이 따로 ‘지분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 과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과정은 어떠했나?
황 : 다음 세 번째 어려움은 시민단체와의 통합이었다. 600여 개 단체가 대상이었는데, 범위와 규모가 커지다 보니 사실상 ‘지분요구’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시민단체와는 주로 박형준 위원장이 접촉했다. 우리는 여기서 협상 대상인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통합과정에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시민단체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자유와 공정’에도 확실하게 ‘지분보장을 못 한다’라고 얘기해 줬다. 지분 관련해서, 자유민주진영 내 강경파 측에도 논란이 있었다. 우리에게 ‘왜 유승민 측과만 이야기를 나누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딱히 유승민 대표 측과만 접촉한 것이 아닌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분이 그런 인식을 갖고 있더라. 결국은 ‘투 트랙(새로운 보수당과 그 밖의 자유민주진영)’으로 논의를 진행하면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는 원래의 모토였던 “우리부터 내려놓자”라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과거의 우리는 각자, 오늘의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통합을 추진한 것이다. 진통과 인내 과정을 통해 1월 14일 통합준비위원회(통준위)가 출범했다. 통합추진체로 정리하자면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가 2019년 6월에서 12월까지 운영됐고, 그 결실로 2020년 1월 통합준비위원회(통준위)가 출범한 것이다.

나 : 결국 미래통합당이라는 결실을 봤다.
황 : 그렇다. ‘헌법가치 아래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라는 대의로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2020년 2월 17일 미래통합당이 출범했다.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안철수 대표까지 지역구에 자당 후보를 내지 않았다. 사실상 통합 또는 연대였다. 이후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승민 대표까지 선거운동에 합류해 4월 12일 청계천에서 합동유세를 했다. 일단 총선 이전 대통합에 성공한 것이다.

나 : 돌이켜 볼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나?
황 : 각양각색의 난관이 있었지만, ‘당내 설득’이 가장 어려웠다. 대통합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당내에서는 우려가 들끓었다. 특히 ‘누구와는 절대 통합할 수 없다’는 얘기와 꼭 함께해야 한다는 구체적 대상에 관한 주장들도 다양하게 있었다. 대상뿐 아니라 통합방식과 조건에 대한 여러 지적들도 많았다. 이어서 통합과정이 구체화하자, 통합정당의 당명과 당 색깔 등이 이슈가 되어 말들이 많았고, 내부갈등이 연속됐다. 총선을 앞두고 가장 민감했던 것은 ‘탈당 인사 복당 후, 내부인사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였던 것 같다. 공천을 앞두고 ‘이런 우려가 곧 현실화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논란들을 정리하기 위해, 1월 30일 내가 직접 의원총회에 참석해서 통합과정에 대해 의원들에게 종합적으로 설명하며 동의를 구했다. 그때 의원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입장을 보여줬다. 마뜩잖은 부분이 있었겠지만, ‘변화가 있어야 한다’라는 큰 흐름에는 공감해 동의를 표해주셨던 것 같다.

나 : ‘국민을 섬기는 낮은 자세’를 주장하셨는데, 총선, 공천을 앞두고 당과 진영 내 우려가 컸다. 특정 ‘지난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이 끝나 잊힌 정치인들을 되살려내 섬긴다’라는 말이 돌았다. 국민이 아니라 사라져야 할 계파수장들을 섬긴다는 비판이었다. 제1야당 당수로서의 통합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황 : 대표인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면서 대통합을 추진했다. 유승민 대표 측이 계속 ‘3대 원칙’을 제시하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탄핵을 인정한다면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부분은 내가 설득해서 ‘탄핵의 강을 넘어 미래로 가자’ 정도로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통합과정에서 더 가진 쪽이 내려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지난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이 끝나 잊힌 정치인들을 되살려내 섬긴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하는데, 우리의 통합은 ‘사람’이 아니라 ‘세력’을 모으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런 지적은 판단의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또 “제1야당 당수로서의 통합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다”라는 지적도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주도권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결국, 유승민 대표도 자유한국당으로 들어왔고, 안철수 대표도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당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음에도 공천을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해서는 내가 진심으로 송구하게 생각한다.

나 :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대표께서 말씀하신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황 : ‘탄핵의 강’이라는 표현 자체는 유승민 대표 측에서 한 표현이다. 탄핵은 자유민주진영에겐 늪이다. 거론하면 할수록 진창에 빠져든다. 일단은 빨리 늪에서 나와야 한다. 그곳에서 이전투구를 해서는 답이 없다. 같은 말을 해도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니 일단 늪을 나와야 한다’라는 생각이었다. 반면 어떤 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런 분들에겐 ‘지난 수년 동안 노력해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언제까지 그런 상황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우리가 늪에서 뒹구는 사이에, 문재인 정권은 웃으며 국정을 농단했다. 더 이상 내부의 문제로 국정 난맥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곧 선거도 닥쳐오는데, 한 발도 나가지 못할 이슈를 무턱대고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 : 보통 정치인은 앞으로 명분을 이야기하며 뒤로 실리를 취한다. 정치인의 말은 행간을 읽어야 대응을 할 수 있다. 대표께서는 ‘명분에 집착하다가 실리를 놓쳤고 결국 엉뚱한 사람들이 실리를 챙겨갔다’라는 지적을 받는다. “모처럼 구축한 ‘야권의 리더십’과 ‘미완의 통합’을 맞바꿔 결국 선거에서 참패했다”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황 :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문제는 명분이나 실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국민이 먼저였다. 명분도 국민이고 실리도 국민이다.

나 : 통합은 아직 미완이다. 과정이 지속되어 완성을 이루어야 할 텐데, 통합이 앞으로는 어떻게 되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황 : 통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다. 근래 ‘우파는 분열 때문에 계속 망했다’라고 하는데, 그나마 미완이라도 대통합을 시도해서 결실을 이뤘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총선 결과가 의원 수로 좋지는 않았지만, 역대 최다득표인 1,190만 표를 확보했다.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통합의 시너지 효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화학적 통합’, 이른바 ‘질적 통합’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으로 본다. 그나마 보람을 느끼는 지점이다. 당에 남아 계신 분들이 그 취지를 살려 더욱 전진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거듭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런 통합노력에도 불구하고 총선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은 국민과 당원들께 너무나 송구하고 죄스럽다. 더 빨리 진척시키고 안착시켰어야 했다. 예기치 않은 변수들이 연이어 돌출하면서 너무 촉박하게 통합이 진행됐고, 그 결과 공천과정의 잡음도 컸다.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 혼돈의 과정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공천을 받지 못한 분들이다. 특히 내가 마땅히 챙겼어야 했는데 챙겨주지 못한 분들에 대해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나 스스로는 희생해도 주위의 희생을 방치하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다.
--- p.184~193, 「통합의 전개과정」 중에서

나 : 언론에 의하면 회담이 처음 결렬됐고, 김종인 위원장이 ‘합류 가능성 1%’라고 까지 말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당시 기분 어땠나?
황 : 모시는 과정은 수월치 않고 어려웠다. 말 그대로 ‘삼고초려(三顧草廬)’ 후, 네 번째 만났을 때야 모실 수 있었다. 그 이전에 김 위원장의 ‘태영호 나라 망신’ 등 발언으로 당내 홍역을 치른 상태였다. 전제적으로 꾸준히 협상이 진행됐고, 시간은 걸렸지만 나름 확신이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그런 언론 보도는 그리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김종인 위원장 구기동 자택을 두 번 정도 찾아갔다. 어떤 분들은 ‘과공(過恭)’이라 했지만 난 선당후사를 위해서는 스무 번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내 체면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 : 김종인 위원장 영입 과정에서 태영호 후보가 큰 상처를 받았다. 어떻게 위로해주었나?
황 : 이후 내가 태영호 후보를 따로 보자고 했다. 나를 만나러 나오는데 지역이 크게 술렁였다고 했다. ‘내가 포기하라는 최후통첩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했다. 예상 밖으로 내가 ‘흔들리지 말고 꼭 이기라’고 당부하고 적극적으로 격려하니 예상 밖이었다고 했다. 본인도 나오면서 ‘자신을 지역에서 빼고 비례대표로 대체 투입하는 줄 알았다’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태 후보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고 했다. 그 뒤 태영호 후보 지역 지원 유세를 하기도 했다.

나 : 다시 김종인 위원장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명실상부 투톱 간 역할부담이 있었나?
황 : 전체적인 선거관리는 김종인 위원장이 맡고, 나는 종로에서 선전해 전체 구도에서 당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겠다고 말했다. 물론 나도 당 대표로서 역할을 다했다. 김종인 위원장께 당 관련된 업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선대위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김종인 위원장은 당내 분위기를 잘 모르시고 전체 팀워크에 녹아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 선대위도 임시기구라 전반적인 당무를 감당하는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종로에 전념한다 해도 총선에서 완전히 지휘봉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전체 총선 결과에 온전히 책임지고 물러난 것이다.

나 : 급조되고 대표가 빠진 상황에서 선대위 의사결정에 공백이 컸다.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과 이진복 선대본부장과의 갈등 등에 관한 사항 알았나?
황 :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해에서 비롯된 과잉갈등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는 내가 개입해야 할 정도의 갈등상황은 아니었다.

나 : 그렇게 총선에서 패배하고 모든 당직을 내려놓으셨다. 그러나 총선 후 당 관리에 대해서는 일정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후 김종인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때 어떤 역할을 하셨나?
황 : 4월 15일 밤 11시 지날 즈음 ‘완패’ 확정이 난 이후 사퇴 결심했다. 이미 이전에 ‘과반 확보를 못하면 사퇴하겠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가 걱정됐다. 어렵게 통합을 성사시켰는데 다시 와해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당내갈등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분이 총선실패 후 흔들리는 당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최소한의 정지작업은 해 놓고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사퇴 기자회견 직전에 당시 나와 함께 공동총괄선대위원장이었던 김종인 위원장에게 전화하면서 우리 당 수습과 총선 정국 마무리를 위해 애써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때 그분 반응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 주실 것’ 같은 뉘앙스였다.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나는 국회 상황실로 돌아와 사죄의 뜻을 밝히고 대표직사퇴를 공식 발표했다. 심재철 당시 원내대표에게도 뒷마무리를 부탁했다.
--- p.244~246, 「김종인 공동총괄선대위원장과 비대위원장」 중에서

나 : 대표 시절 가장 아쉬웠던 점과 그 순간을 말씀해 달라.
황 : 가장 아쉬운 것은 역시 총선 패배다. 많은 준비를 했었다. 우선은 전국을 다니며 국민 목소리를 듣는 ‘민생대장정’부터 시작했다. 그것을 토대로 해 ‘경제 대안’, ‘안보 대안’, ‘교육 대안’ 등을 만들어 국민 앞에 해법으로 제시했다. 또한 당을 살리고 총선이나 향후 대선을 위해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인재영업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두가 1차 목표인 ‘총선 승리’를 위한 것으로 모아졌다. 그런데, 패배를 넘어 ‘참패’를 했기에 아쉬움을 넘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이룬 ‘통합’의 성과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통합이 총선 승리로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쉽다. 통합을 위해 애썼던 많은 분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 통합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물론 각자 이해관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협상에 임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대승적 결단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실패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장기적 승리를 위해, 그동안의 통합과정을 참고해서 잘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 아쉬운 장면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황 :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 이유가 분명히 있고, 이를 분석하는 분들도 많았다.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그 반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를 교훈 삼아 전혀 다른 각오로 임한다면 결국은 정의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국민께서 여전히 당에 마음과 관심을 덜 기울이시는 것 같다. 지난번 총선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국민 마음속에 들어가 우리 뜻을 정말 진솔하고 진실하게 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해법일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해답이라는 것이다.
--- p.253~255, 「정당대표 시절 아쉬웠던 점」 중에서

“이회창 선배의 대쪽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순발력, 허주 김윤환 의원의 유연성, 그리고 일부 전·현직 의원들의 거짓말 능력을 모두 갖췄으면 좋겠다. 너무 욕심쟁이인가?
--- p.62~63, 「정치적 롤 모델은」 중에서

그렇게 속없이 내려놓기만 했던 황교안도 다시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사기꾼 김선달은 영웅이 되었지만, 자기 땅을 빼앗긴 사람은 바보가 됐다. 총선 이후 당을 보면 결과적으로 황 대표가 당한 쪽이다. 그러나 그에게 인정되는 부분도 있다. 그가 추구한 것은 ‘통합’이었고, ‘나라의 정상화’였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려놨다. 물론 개인적인 욕심이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권욕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동기부여 전부라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대권을 가졌던 사람은 100%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짧지만 대통령권한대행을 통해 대권을 경험해 본 사람이다. 감질나기도 했겠지만,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그의 동기가 사익(私益)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력이다. 공직자는 두 가지 능력을 갖춰야 한다. 공적인 능력과 인간적 자질이다. 공자(公子)는 이를 ‘문(文)’과 ‘질(質)’로 구분해 설명했다. 문(文)은 인문(人文), 문화(文化), 문학(文學)할 때처럼 인공(人工)을 의미한다. 질(質)은 본질을 의미한다. 공자에 의하면 공직자의 우선적인 요건은 ‘질’보다 ‘문’이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공직자의 자질과는 거리가 있지만 현실을 냉정히 반영한 것이다. “여우 같은 아내와는 살아도, 곰 같은 아내와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다. 삶은 현실이고 현실에서는 여우의 지혜는 필수다. ‘나쁜 남자 신드롬’도 이를 보여준다. 나쁜 남자는 능력은 있지만 인간미가 없는 이기적인 남자를 의미한다. 능력 있는 배우자가 이기적이라면, 그 이기주의의 범주 안에 들어간 배우자는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둘 사이의 자식에게도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힘 있는 나라 국민은 그 국가가 ‘깡패국가’ 소리를 들어도 큰소리를 치며 세계를 누빈다. 제국주의 국가 국민이 그랬다. 국내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의 공권력이 약하면 힘없는 사람들은 깡패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 무리에 소속되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깡패집단의 지도자는 인성보다는 주먹(능력)이 중시된다. 그렇게 능력이 인정된 사람이 인성까지 갖추면 더 큰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자질은 ‘선능력, 후인성(先能力, 後人性)’이 되는 것이다. 공자의 지도자관도 이를 인정하고 설파됐다. 그래서 ‘공자님 말씀’을 뻔한 명분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큰 오해다.

황 대표는 국정 능력은 증명했다 하지만 입문 당시 정치력은 일천했다. 정치입문과 동시에 대표가 되었으니 학습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가 국정 책임자가 되어 국가 차원의 더 큰 영역을 관리하면, ‘국민통합’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 단계 헤게모니 싸움에서는 그의 진정성은 방해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지난 실패에서 교훈과 깨달음을 얻고 정금같이 단단해졌냐는 것이다. 교훈을 얻는 것은 진정한 반성이고, 정금같이 단단해지는 것은 새로운 정치 대안(정치적 메시지와 화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확인되면 황 대표도 다음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p.283~285, 「리더의 소명 - “황교안도 재활용되나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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