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기자로서 접했던 다양한 경험을 녹이기 위해 애썼다. 주로 정치, 사회, 정책 부서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기자는 공동체 감정을 유통시키는 최전선에서 복무한다. 공동체 감정에 매우 기민하고 예민한 직종이다. 기자들은 텍스트를 통해 대중을 흥분시키고, 때로는 절망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 시대 혐오 현상은 ‘언론사’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반성과 ‘기자’의 성찰 없이는 설명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 p.21~22
혐오가 공동체의 공적 감정으로 인정받게 되는 전형성이다. 특정 개인이 SNS와 같은 사적 영역을 통해 “나는 그들이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지지받은 권력이 “우리는 그들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서 체계적이지 않은 형태로 나돌던 혐오 감정을 공론화하는 것은 혐오에 규범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인증성’이다.
--- p.33
엠케는 혐오가 특정 개인의 자발적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부추겨진 감정임을 강조한다. 즉, 혐오는 갑작스럽게 폭발해 나오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설계되고 유도되며,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p.50~51
이제 우리는 악의 평범성, 그 이상의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혐오의 규범성’이란 테제를 제시한다. 사유하고 판단할 줄 아는 민주주의 시민들이 고민한 결과, 혐오라는 감정 역시 어떤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여겼고, 그렇게 혐오가 규범적 위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한 결과 ‘악’이라고 여겨진 것도 어쩌면 ‘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즉 우리의 사유 능력이 현격히 저하된 틈을 타 ‘외부’의 악이 음습한 것이 아니라, 그 ‘악’이라 일컬어지는 감정이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의 ‘규범’ 체계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혐오는 선과 악이 얽히고설켜 복잡하고 혼잡스러운 형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 p.81
다만, 민주주의 시스템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감정 균형이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민주주의가 감정 균형을 ‘지향’한다고 표현했다. 감정 균형은 이상적 목표에 가깝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단한 합의의 노력을 통해, 시스템의 의도적인 활용을 통해 ― 그리고 어떤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 끊임없이 성취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감정 균형에 가까워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제도이며, 그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공동체의 감정은 늘 위태롭게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 p.94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합의되고 심사받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 공동체를 부유할 때 이 감정을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지고, 그 부정적 감정이 강해질수록 종국적 감정인 혐오에 도달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주의 시스템하에서 혐오 감정이 거센 공동체는, 혐오로 전화되기 전의 그 부정적 감정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뜻이며, 감정을 합의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민주주의 역시 얼마든지 혐오에 취약할 수 있다. 민주주의 공동체가 감정 위기에 직면할 때, 즉 감정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혐오는 얼마든지 거세질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 p.96~97
당시 정치 권력자들의 전략은 누가 피해자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단원고 유족을 피해자 자격이 없는 피해자로, 일반인 유족을 피해자 자격이 있는 피해자로 분류했던 것은 ‘피해자다움’ 혹은 ‘유족다움’이 그 기준이 되었다. 피해자다움은 우리에게 익숙한 물음이다. 법학과 범죄학, 특히 여성학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온 이 개념은 범죄나 재난, 참사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고정관념으로 구성되며 그 기준에 따라 피해자의 지위가 규정된다.
--- p.122
한 일본 언론이 후쿠시마에서 다른 곳으로 피난 간 741명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더니, 괴롭힘을 당해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는 답변이 45.1%로 절반에 달했다. 보상금에 대한 공격이 274건으로 가장 많았다. 지역 행사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비롯해, 피난인의 자동차를 망가뜨리는 식의 폭력적인 괴롭힘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고 당시, 한국과 일본 공동체가 참사 피해자를 다뤘던 방식은 놀라울 정도의 기시감이 있었다. 사고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 공동체 역시 후쿠시마 원전 피해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했다. 모금운동을 벌였고 국제적인 도움의 손길도 이어졌다. 하지만 복구가 지난하게 길어지면서 공동체 구성원 누군가는 피해자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불편함은 혐오로 전화되었다.
--- p.125
무한대의 소통을 보장했던 SNS는 우리의 기대대로 상서로운 역할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권력에 유착했던 기성 미디어의 힘을 빼놓으며 소통을 무한대로 증폭시킨 SNS의 뒤안길에는, 그 속도만큼 부정적인 감정을 유통시키는 역설을 내재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 혐오는 SNS를 통해 강력하게 전염되고 증폭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확산 속도만큼이나 극단론자의 목소리도 쉽게 퍼질 수 있었다. 이제 SNS에 대한 논의 없이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수 없을 정도에 다다랐다. SNS로 소통이 극대화된 시기, 역설적이게도 ‘공론장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 p.179
화자가 해당 공간에서 상대의 반박을 염두에 두고 말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화법 역시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화법이 달라지면 화자의 감정도 달리 전달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화법 형태를 변화시키는 두 공간을 크게 ‘연설 공간’과 ‘토론 공간’으로 달리 구분한다. 연설 공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공간이다. 텍스트는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흐른다. 물론 연설 공간에서도 양방향 소통이 없지는 않다. 박수나 환호성, 구호, 야유와 같은 반응들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지지나 반박은 제한된다. 연설 공간에서 화자는 굳이 논리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표현의 제약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거침없이 말해도 괜찮다. 아니,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연설화법은 극단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다. 선동은 늘 연설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 p.190
민주주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감정 합의를 통해 감정 균형을 지향한다는 것은 이 책의 전제다. 그 살얼음 같은 과정 속에서 감정 합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주체는 엘리트들이었다. 정치인과 관료, 나아가 학자나 언론인 등이다.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감정 합의를 위해 복무하도록 ‘위임’받았다. …… 결국, 엘리트들은 실패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말처럼 대중은 정당이 운영하는 은행에 자신들의 감정을 맡겼지만 ― 슬로터다이크는 구체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맡겼다고 표현했다 ― 정작 정당을 비롯한 엘리트들은 그 예금을 탕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동체 도처에서 혐오가 창궐할 때까지.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이들이 포퓰리스트다. 공동체 감정을 존중하는 자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며.
--- p.245~246
민주주의 공동체 내에서 혐오 담론이 불거지지 않았던 이유는 도덕과 윤리와 같은 민주주의 원칙 덕분이라기보다는 감정 협의와 합의의 과정을 통해 감정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작업이 비교적 잘 굴러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공동체 곳곳에 잠재된 부정적인 감정이 공론장에 올라오지 않도록 하는 자정작용이 순조로웠다. 이러한 순조로움에는 여러 조건이 있다.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덜 도드라지는 환경이거나, 감정 협의와 합의의 업무가 잘 수행되도록 공론장이 잘 마련되어 있거나, 협의와 합의 업무를 위임받은 자들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 그 순조로움을 보장하는 조건들이 마모되기 시작했다.
--- 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