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5백 평이 0.75평 독방에서 징역을 사는 무기수인 양 턱없이 비좁게 느껴지곤 한다. 그때마다 돌려 생각한다. 시속 7백 킬로미터로 비행하는 제비갈매기의 날갯짓도 광막한 우주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다. 하루 종일 배밀이를 해도 고작 몇 십 미터에 불과한 민달팽이의 이동을 그 누구라고 덧없노라 함부로 판단하겠는가.
그러니까 모두 마음먹기 나름이다.
마음먹기 나름.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다. 혼자 있지 못해 외로운 것이다.
8년 동안 등대를 바라보며 자족하는 법을 배웠노라고, 재우는 믿고 있다.
--- p.11
난희는 긴 한숨을 여운처럼 남기고 사라졌다. 난희의 침묵을 이해하고 싶었고, 한편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삶은 확신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미명의 안개 속에서 낯선 길을 찾아 나선 것과 같다. 그저 살아보는 것이다. 뚜벅뚜벅, 혼돈과 불안을 누르며 저 미지의 땅으로 가보는 것이다. 산을 만나면 넘어서고, 물이 가로막으면 건너고, 막다른 길과 마주치면 이제껏 걸어왔던 그 길이 바로 되짚어가야 할 길이다.
--- p.21
재우는 고개를 젖혀 등탑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멀어져서 외로운 게 아니다. 물리적 거리는 마음의 거리와는 무관하다.
구명도에서 지낸 세월이 깊어지면서 재우는 알았다. 구명도라서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버림받은 자를 두 팔 벌려 품어준 구명도였고, 등대였다.
등대지기는 등댓불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의 몫이었다. 등댓불을 흩뿌리는 등탑, 애오라지 거기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등대지기의 숙명이었다. 그게 등대를 온전히 사랑하는 길이었다.
--- p.84
한 그루 고목에서 누구는 세월의 흐름만 살펴보지만, 또 누군가는 세월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등대가 바다의 길잡이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등대의 불빛으로 마음의 길까지 짚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있기에 등대를 떠나도 아주 떠나지 못하는 정 소장이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재우 역시 무인등대 전환과 구조 조정의 광풍이 자신을 비껴가길 소원하는 것이리라.
--- p.153
“은행나무 사랑이라고 아니?”
묻고 나서 난희는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더했다.
“암수가 구분된 은행나무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만을 사랑한대. 저 멀리 아무리 근사한 상대가 있어도 오로지 곁의 나무만을 짝으로 삼는대. 추하든 부족하든 무조건……. 난 그런 사랑밖에 못할 운명이었나 봐.”
그 운명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니?
재우는 난희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희는 하품을 깨물고는 말했다.
“졸려. 자야겠어. 나가기 전에 이불 좀 펴 줘.”
“힘든 일도 아닌데, 그러지 뭐.”
--- p.180
명예를 얻거나 부를 획득하는 것을 희망으로 간주한다면, 난희의 말대로 재우는 희망이 없는 사내였다.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인정하고, 그 자리가 세상의 따뜻함에 기여하고, 그 따뜻함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희망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재우는 날마다 희망을 품은 채 살고 있었다.
--- p.203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툭, 의도치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가슴 깊이 애써 숨겨 온 갈망이었고, 그걸 지금 확인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재우 편에서 선택한 기회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당신을 증오하는 자식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병든 몸을 이끌고 구명도까지 오게 된 것이리라.
--- p.268
희망도 계획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다 아무 곳에나 쓰러져 죽어가길 원했던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를 기꺼이 받아준 등대였다. 가족도 사랑했던 사람에게서도 버림받은 외로운 영혼, 그 영혼을 두 팔 벌려 감싼 등대였다. 사내는 그게 눈물겹도록 고마워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등대를 보듬어왔다.
8년이었다. 강풍과 폭우, 뙤약볕과 혹한 속을 함께 달려온 세월이었다. 그 세월 동안 등대는 사내에게 벗이었고 연인이었다.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였으며, 고단한 일상을 기댈 언덕이었다.
하지만, 떠나야 한단다.
--- p.285
재우는 등명기 하단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전원장치 부분이 비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빗방울은 재우의 얼굴까지 미치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온몸으로 빗방울을 막아주고 있었다. 재우가 수없이 만류했지만 어머니는 내내 고집을 부렸다.
재우는 등대를 지키고, 어머니는 등대지기인 아들을 지키고 있었다.
--- p.320
“아들이 등대지기면 엄마도 등대지기예요.”
재우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느 결에 어머니가 다가와 슬며시 재우의 손을 잡아주는 듯했다.
“엄마, 이젠 알겠어요.”
재우는 눈을 감았다.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가 보여주는 길을 따라 등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엄마는 재우의 등대지기였어요.”
--- p.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