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나는 집안일을 하나도 모르는 그와 역할을 나눌 때, 항목을 세세히 적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단어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 각서를 다시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청소’만 해도 정리 정돈, 먼지 털기,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 청소기 먼지통 비우기, 걸레 빨기 등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빨래’는 세탁물 모으기, 세탁기 돌리기, 널기, 걷기, 개기, 옷장에 넣기 등의 연결된 일들이 있다. 이런 구체적인 항목 없이 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정했더니, 남편이 맡은 일조차 상당 부분 내가 하는 형국이 되었다. --- 「나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중에서
제 몸만 챙기면 되던 인간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갑자기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한다. 이 과정을 ‘엄마라면 당연하다’며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은 폭력적이다. 한 인간을 책임지기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완성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질문에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힘든 건 당연한 거야”라는 답이 간절했다. 문제는 나의 모성이 아니었다. --- 「비육아체질」 중에서
내가 남편의 임금노동에 빚이 있다면,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남편은 내 돌봄노동을 기반으로 애가 아프거나 말거나, 방학을 하거나 말거나 걱정 없이 일에 집중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애가 둘이나 있는데 출퇴근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서 일하러 다니는 것, 애들의 어린이집 생활, 교우관계, 안전한 먹거리, 건강에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는 것, 일이 많을 때는 야근하는 것, 실력이 쌓이고 연봉이 오르는 것, 애 둘의 아빠가 되었어도 사회생활이 순조로운 것은 애 둘을 돌보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중에서
집 안에 내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나는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여자인 내가, 엄마인 내가, 아내인 내가 이런 걸 가져도 되는 거야?’라고 속으로 되뇌던 의심이 사라졌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공간은 지금 내 삶과 내 모습 그 자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이자, 내가 딛고 서서 머무는 곳이다. --- 「여자들의 서재」 중에서
생계 부양의 리스크를 둘이 나누게 되면서 남편은?‘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그는 처자식 위해 억지로 회사에 다니는 거라며 울상을 짓고 세상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진 듯 비통해했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그가 당장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우리 가족이 굶지는 않으니까.?그래서 남편이 징징거리면 이때다 싶어서 쿨하게 대꾸한다. “그만둬,?내가 책임질게.”?꼭 한 번 해보고 싶던 말. --- 「일인분의 자립을 위하여」 중에서
“그걸 왜 친정 엄마 시켜요?” “착취 아니에요?” “돈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일제면 한 달 최소 이삼백인데.”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 시간,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가해자가 된 입장을 잘 정리해보세요.” 내가 가해자라고? 엄마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 낱말에 목구멍이 컹 했다. “이제 엄마 오시지 말라고 해요”라는 말에는 내 입에서 쏜살같이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엄마 없으면 안 돼요!”
--- 「55년생 오한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