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에 관한 문제는 생물학적인 본능의 차원을 넘어 한 개인의 정체성인 자아 정체성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성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인식도 강해졌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헌법상 기본권에 관한 문제이다
--- 「머리말」 중에서
성별은 남녀의 이분법으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염색체 이상 등으로 인해 이른바 간성(間性, intersex)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성의 생식기를 모두 갖고 태어나거나 또는 생식기의 외견은 여전히 남성 혹은 여성으로 보이지만 수태 능력이나 외모, 신체적 능력 등에서 성적 특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거나 반대 성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5) 간성인의 존재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으로만 분류될 수 없다는 문제를 환기시킨다.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남녀를 구별하는 이분법이 오랜 기간 유지돼 왔는데, 실제 존재하는 남녀는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을 더 많이 갖고 있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남성 간이나 여성 간 차이보다 크지 않다. 남녀의 차이와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를 비교할 때 어느 경우가 더 유사한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p.19~20
사회는 보통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라는 성별 특성에 대한 기대에 관한 ‘성별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을 갖고 있다.12) 남성의 성기는 외부에 돌출해 있고 정자는 활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남성의 성격도 진취적·능동적·적극적인데 반해 여성의 성기는 숨겨져 있고 난자는 수동적으로 정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성의 성격도 수동적·소극적·내성적이고 조신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비유라면 몰라도 성기의 구조를 통해 성격을 유추한다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다. 사람의 성격은 남성 간에도 천차만별이고, 여성 간에도 천차만별이다.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계절이나 날씨, 그날의 신체적 조건, 사람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다양한 성격형으로 표출된다. 성기의 구조에서 성격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p.27
자유와 권리는 나만의 자유와 권리일 수는 없다. 따라서 자유권의 개념상 요구되는 한계로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폭행이나 협박으로 침해하면서 나의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폭력(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등)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
둘째, 상대방이 설령 성행위에 동의를 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손상하거나 상대방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지나칠 정도로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위를 강요하거나 상대방에게 피학적 성행위를 강요하는 등 지나치게 모욕감을 줄 수 있는 권리행사도 허용되지 않는다.
셋째,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성욕의 충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인 수간(獸姦)은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의 결과 타 생명을 침해해서는 안 되는 한계가 있다. 만일 임신을 원치 않는 경우라면 서로에게 적절한 피임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도 국가적·사회적·공공복리 등의 존중에 의한 내재적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판시함으로써 ‘국가적·사회적·공공복리 등의 존중’이라는 한계를 제시한 바 있다.
--- p.70
현재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성은 넘쳐나고 있다. 따라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를 논하는 데 대부분의 평균적인 남성들을 포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를 논하는 이유는 여성,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환전자) 등의 성적소수자를 포함한 ‘성적 약자’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p.79
장애인의 경우 외견상의 차이로 인해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 아니면 보호나 배려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그들도 같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성적 욕구를 느끼고, 성적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측면은 애써 무시되었다. 2002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에서 주인공 ‘홍종두(설경구 분)’가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인 ‘한공주(문소리 분)’의 “같이 자자”는 제안에 합의하에 성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공주의 식사를 챙겨 주는 ‘상식’과 상식의 처에 의해 둘의 성교 사실이 발각되고 경찰이 출동하게 되어 억울하게 종두는 강간범으로 오인 받아 체포된다. 종두를 심문하던 ‘형사 1’은 “솔직히 말해 봐, 변태지?”,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돼. (종두에게) 야 인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장애인도 성적 욕구를 느끼고, 비장애인과 성교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형사 1 개인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 p.173
동성애를 허용하면 부부 중심의 성이라는 도덕이 붕괴되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발상은 ‘이성애 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의 시대착오적 논리이다.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티 밀이 『자유론』에서 밝힌 ‘해악의 원리(harm principle)’에 따르더라도 동성애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해악의 원리’에 따르면 사회적 개입은 다른 사람에 대한 해악을 방지하기 위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동성애는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동성애의 영향은 자유로이 동성애관계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미친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옷차림이나 행동거지 자체가 불쾌감을 줄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손상하는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법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불쾌감 야기(offense principle) 원리’에 따를 때 법적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세계적으로 동성애와 관련된 제도가 합법화되고 있고, 동성애에 대한 차별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대다수에게 공분을 살 정도의 불쾌감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이 개입할 여지가 있지만, 일부의 사사로운 감정만에 의해서 법이 개입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