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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

[ 양장 ]
리뷰 총점9.7 리뷰 36건 | 판매지수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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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26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768쪽 | 1124g | 147*218*40mm
ISBN13 9788960518469
ISBN10 896051846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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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신의 이름 아래 하나의 제국을 이루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황제 권력을 교회의 미래와 더 단단히 결부시키리라 마음먹고 새로운 수도 건설 작업에도 돌입한 참이었다. 새 수도에는 그 초창기부터 로마 신전이 아닌 그리스도교 교회가 곳곳에 들어서게 할 작정이었다. 흑해와 통하는 연안에 위치한 비잔티움의 옛 도시를 그리스도교 도시로 재건해, 로마에서부터 그곳으로 자기 제국의 수도를 공식적으로 옮기고, 로마에 모셔져 있는 신들까지 함께 새 수도로 데려오겠다는 것이 콘스탄티누스가 전부터 죽 품어 온 복안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일순간에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합법적 정치 세력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기치를 내걸고 처음 군대를 출정시키고자 했을 때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교회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이 그랬듯, 처음 얼마간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교회도, 콘스탄티누스가 그랬듯, 장차 자신의 미래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자 부리나케 달아나 제국 동쪽 언저리 팔레스타인 땅에 몸을 숨겼다. 이로써 아리우스주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자취를 감추기는커녕, 여전히 물밑에는 정통 교설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리우스주의의 기류가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동생 콘스탄티아만 해도 니케아신조를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정통 교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리우스주의의 제일 강력한 신봉자로 이름을 떨치는 형국이었다.

콘스탄티아가 그렇게까지 된 건 아마도 사무친 원한 때문이었으리라.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325년의 어느 날, 남편 리키니우스를 관용을 베풀어 살려 주겠다고 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돌연 약속을 깨고 그를 목매달아 죽였으니 말이다. 황위에 도전하려는 자는 아주 싹부터 잘라 버리려는 듯,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누이동생의 열 살짜리 아들도 함께 교수대로 보냈다.
--- p.32~33

4장 페르시아의 위협

페르시아 정도 되는 큰 제국을 경영하려면 아무래도 칼을 잘 휘두르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탁월한 행정 능력도 반드시 받쳐 주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새로운 통행 패턴을 발명해 낸 것은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지적이고 영민한 샤푸르 2세였으니, 눈앞의 세상은 다 지배하고 말겠다는 계획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1세로서는 정말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동쪽의 비잔티움으로 옮긴 것은 페르시아의 동방 패권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그래도 샤푸르 2세에게 처음 다가갈 땐 콘스탄티누스 1세도 꽤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샤푸르 2세가 주변의 섭정들을 깨끗이 털어 내자마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신을 보내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꽤 분명한 어조로 일렀다.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도들을 더는 박해하지 말라고. “내가 〔그들 앞에서〕 당신을 칭송하는 것은 당신이 그만큼 위대해서요”라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주 약삭빠르게 썼다. “당신이 늘 사람을 아껴 왔던 그 마음으로 부디 그들도 소중히 대해 주길 바라오. 그 까닭은 그 같은 믿음의 표시가 당신 자신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덕을 베풀어 주기 때문이오.”

샤푸르 2세는 자기 나라 안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자비를 보이겠다며 순순히 응낙의 뜻을 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관용을 베풀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한이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숨 왕국의 아프리카인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악숨 왕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그 자신이 천당에 가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악숨 왕국과 로마 제국의 우정을 보란 듯 만방에 공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 p.74~75

7장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다

소수림왕(371~384)이 왕위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한 불교 승려가 고구려 왕실을 찾았다. 순도라는 이 승려는 왕에게 올리는 각종 헌상물과 함께 한 손에는 불경을 쥐고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이 곧 고구려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줄 힘이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소수림왕은 순도를 환대하며 그가 들려주는 말들을 경청했다. 372년, 소수림왕은 흔쾌히 불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의 유교 원리에 바탕을 둔 국립 유학 교육 기관인 태학을 나라 안에 설치했다.

불교와 유교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종교였지만 곧 하나의 혼합체를 이루어 고구려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소수림왕을 비롯한 그 가신들에게 순도는 불만족, 불행, 야욕, 두려움 같은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상태로, 실상은 그 존재가 없는 이른바 ‘상스크리타’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라는 왕국 역시 ‘상스크리타’에 불과해 궁극적 실체가 따로 없었다. 이 이치를 소수림왕과 그의 관료들이 진정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타이완의] 불교 대선사(大禪師) 성옌[1931~2009]의 말마따나) “이 세상과 눈앞의 현상들이 실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이 세상 속에서 오롯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진실을 안다면 이익, 안전, 행복을 갈구하는 마음에 좌우되거나 또 때 묻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고구려는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위태위태한 나라가 더는 아니었다. 자칫 무너질 뻔했던 고구려를 소수림왕이 간신히 추슬러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구려가 정복이나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설 수 있을 만큼 그 기반이 단단히 다져진 건 또 아니었다.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 p.128~130

14장 굽타의 쇠락

명문에 따르면, 막판에 가서는 굽타 왕조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기의 굽타 왕조는 만사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쿠마라굽타 1세 치세 말년에 만들어진 동전들만 봐도 더는 은이나 금으로 주조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시절 동전들은 대체로 구리로 주조됐는데, 표면에 얇게 은을 도금해 안의 하급 금속 재질이 드러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굽타 왕국의 국고는 완전히 동이 나 버린 상태였다.

455년 쿠마라굽타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겪던 문제들을 고스란히 스칸다굽타(455~467)가 물려받은 셈이 됐다. 우선 스칸다굽타는 또 한 번 에프탈족의 침략을 격퇴하지 않으면 안 됐다. 당시 일을 기록한 승전비에 따르기로, “스칸다굽타는 적군의 자존심을 뿌리부터 짓밟아 놓았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으로 스칸다굽타도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칸다굽타가 즉위하고 몇 년 동안은 굽타 왕조 내에 각종 사건이 불거지며 정국이 어지럽게 돌아갔지만, 가중되는 이 혼란이 어떤 식이었는지는 혼미하게 그려질 뿐이다. 백성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관료 간에는 알력 다툼이 빈발하고, 제국 언저리에서는 전쟁 군주들 및 소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만 알뿐이다. 스칸다굽타는 치세 내내 쉴 새 없이 싸움을 벌여, 굽타 제국이 갈래갈래 쪼개지는 것만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460년대에도 내내 옛 굽타 제국 전역에는 스칸다굽타의 승전비가 계속해서 세워졌다.

이런 승전비가 맨 마지막으로 세워진 게 467년이었다. 그 이후로는 증거가 앞뒤가 맞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이해에 스칸다굽타가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굽타 제국 안에서는 제위를 둘러싼 전쟁이 발발해 외우와 내란이 겹치는 상황이 전개된 듯하다. 처음에는 스칸다굽타의 형제가 제위를 주장하더니 나중에는 조카까지 가세했다. 종내 제위에 올라앉은 이는 스칸다굽타의 둘째 조카 부다굽타(c. 467~497)였다. 부다굽타는 30년 동안 제위에 무사히 앉아 있을 수는 있었지만, 굽타 왕조의 왕으로서 제국 비슷한 무언가를 통치한 것은 그를 마지막으로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 p.223~224

27장 아메리카 대륙

가뭄과 홍수는 두 아메리카 대륙을 이어 주는 중앙아메리카의 가교 전체에 영향을 끼쳤지만, 사포텍족이 수도로 삼고 있던 몬테알반은 악천후로 인한 결과를 추적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테오티우아칸의 경우 각종 제식에 쓰였던 건물에 방화를 한 걸 보면, 예전에 도시 안으로 끌려가다시피 했던 주민들이 통치자들에게 꽤나 큰 원성을 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평상시 전제적이고 고압적인 통치를 견디며 살아가야 했고, 기근이라도 덮치는 날엔 당장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기세였을 것이다. 사포텍족도, 테오티우아칸의 왕들처럼, 그렇게 온화하고 신사적인 통치자는 되지 못했다. 몬테알반에 남아 있는 제식 건물의 부조 작품들만 봐도, 부족장 여럿이(아마도 오악사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외지 출신이었던 것 같다) 부족민들에게 사로잡혀 길거리를 알몸으로 행진하는가 하면 신체를 절단당한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래도 사포텍족 통치자들은 자기 도시 주민들을 어느 한군데로 몰지는 않았다(테오티우아칸은 주민들을 한군데로 몰았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기근과 질병에 쉽사리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사포텍 주민들은 훨씬 넓은 지대에 퍼져 있었고, 그런 만큼 굶주림과 참사가 닥쳤다고 해서 어느 한 곳에서 폭력 난동이 불붙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울러 ‘해독 가능한’ 상형 문자의 범위에서 봤을 때, 사포텍족이 쇠락에 들어섰다는 연대 기록 역시 지금은 나오지 않고 있다...

마야족이 세웠던 도시들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히 파악하기는 앞의 두 도시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마야족이 세운 도시들은,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이웃들과 달리, 시종일관 독립을 유지해 나갔다. 이들 도시는 여간 자율적인 게 아니어서 서로 동맹을 맺고 공조할 때도 많았지만 그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일도 그만큼 잦았다. 마야족과 관련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인명과 행적은 다음의 몇 가지가 고작이다. 하늘의 증인이라 불린 통치자가 10년 동안 5만 명이 넘는 칼라크물의 주민을 다스렸다는 것, 물의 군주라고도 불린 카라콜의 왕이 바로 옆에 이웃한 티칼의 왕을 쳐부순 뒤, 562년경에 그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

한편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은 마야족이 건축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감각을 지녔는지 확인시켜 준다. 웅장한 규모의 황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메리카 대륙 한편에 우뚝 서 있는 칸쿠엔이 바로 그런 사례다. 치첸이트사에는 마야족이 세웠던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정교한 구기 경기장이 건설돼 있는데, 이곳에서 선수들은 삶과 죽음을 대표하는 양편으로 나뉘어 돌로 만들어진 링에 공을 메다꽂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는 아마도 신성한 의례의 일부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으로서는 대강 짐작만 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그렇지만 선수들의 목이 잘려 나간 모습을 묘사한 부조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편 선수들은 사활을 걸고 일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p.425~427

28장 위대하고 거룩한 황제 폐하

이즈음 아프리카, 엄밀히 말하면 나일강 바로 옆 동쪽 땅에서는 악숨 왕국의 군대가 아라비아반도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전쟁의 목표는 아라비아반도에 자리한 왕국 힘야르로, 홍해를 사이에 끼고 악숨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나라였다. 힘야르가 아라비아 남부에 터를 잡은 지는 600년. 이제 힘야르는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의 자기 옛 땅은 물론이요 일명 킨다족으로 불리는 아라비아반도 중앙부 일대의 부족에게까지 저 나름의 패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악숨 왕국과 힘야르 왕국은 바다를 사이에 끼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인종 구성에선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비좁은 해협을 통해 벌써 수 세기 동안 이주가 이루어진 터라, 바다 양편에도 서로 비슷한 성격의 아프리카-아라비아 왕국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숨 왕국은, 한때 그곳을 다스린 에자나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친교를 맺은 이래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자리매김한 지가 벌써 200년이 지난 데다, 그렇게 우의를 쌓은 이후로는 죽 로마인들의 동맹 역할을 해 왔다.

힘야르의 백성 대부분은, 이와 반대로, 여전히 아랍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사실 아랍의 전통이라는 이 구호만큼 제각각에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제 민족의 관습을 아우르는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510년에 접어들자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됐다. 이뿐 아니라 그 정의마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퇴색해지는 감이 있었다. 아라비아반도 북쪽 땅은 페르시아 및 로마 관할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도시들은 죄다 연안 일대 아니면 이 북쪽 지역에 몰려 있었고, 아라비아반도 사막 지대에는 베두인족이라 불리는 여러 갈래의 유목민들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이들 베두인족과 도시 주민들은 계통상 대체로 조상은 하나였지만, 자원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서로의 생활 방식까지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이였다.
--- p.429~430

38장 당의 패권

이제 광활하게 뻗은 당 제국의 영토는 저 멀리 페르시아 국경에까지 가 닿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듯 당의 위세가 막 절정에 오르려는 찰나, 황제 고종이 몸져눕고 만 것이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이 무렵 당 고종은 극심한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린 데다 한동안은 시력까지 잃을 정도로 병이 위중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뇌졸중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은데,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황제가 의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총명함에 유교적 소양까지 겸비한 무측천이었다. 당 고종은 병석에 누운 채로 국무를 처리할 수 있게 공문서를 그녀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자기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결정을 내릴 권리까지 그녀에게 주었다.

한반도에 자리 잡은 신라에서 사절단이 파견돼 당 황궁을 찾아간 것이 바로 무측천이 이와 같은 식으로 당의 실권을 쥐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무열왕(654~661)이 다스리는 신라가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했지만, 이웃국인 고구려와 백제가 일본의 왜와 돈독한 우의를 다지는 상황이라 무열왕으로서는 그들 사이의 삼각동맹이 자못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측천은 신라의 백제 정벌에 당나라 병사 13만 명을 대 주기로 결정했고, 이어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국경 지대인 황산벌에서 대규모 전투(660)가 벌어져 백제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의자왕(641~660)은 얼마 못 가 나당 연합군에 백기를 들고 투항해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됐다. 정작 그를 데려간 나라는 신라가 아니라 당이었다. 당시 무측천은 한반도의 정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는데, 당나라 원군을 파견한 이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 은근슬쩍 발을 들이밀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무열왕은 이제부터 신라와 백제는 자신이 맡아 다스린다고 선언했지만, 그러는 사이 백제 반군들도 바삐 움직여 항전을 위한 조직 구성에 들어갔다. 황산벌전투에서 용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일단 도망치듯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자왕은 생포돼 중국에 넘겨졌지만 슬하의 아들들은 진작부터 일본에서 생활해 왔었기 때문이다. 애초 백제의 왕자가 일본에 가게 된 이유는 하나,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을 굳건히 지키고자 일종의 볼모이자 보증으로 잡혀간 것이었다. 백제 유민들은 바로 이 왕자[부여풍]가 잡혀 있던 곳을 찾아가, 야마토 왕조의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부디 자신들이 살던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 p.636~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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