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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한 번쯤

살아가다 한 번쯤

이새늘 | 동아 | 2021년 02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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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362g | 128*188*30mm
ISBN13 9791163024569
ISBN10 1163024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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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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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딥니까?
“네?”
―어디냐고.
되묻는 연아에게 날아든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딱딱했다. 재현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위치를 말해 버린 연아가 후회의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서 기다려.
연아는 코트 깃을 여미며 차갑게 언 손을 비볐다. 화가 난 걸까? 아니, 왜? 연아는 그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두고 먼저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찾는 건지.
‘임다애 팀장님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혼자 추측해 봐야 답도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내내 잡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가 기다리라고 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얇은 스타킹만 신은 다리가 꽁꽁 언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오려면 멀었을 거라고 생각한 찰나, 타이어의 마찰음 소리와 함께 길가에 서는 건 분명 서재현 대표의 차였다.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는 긴 다리도, 잘생긴 얼굴도 모두 그가 맞았다. 행사장에선 깔끔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하얀 와이셔츠 위에는 재킷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의 굳은 표정이 연아의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 자꾸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의 끝엔 꼭 임다애가 있다.
임다애 팀장이 자신을 못살게 굴어선지, 그와 사귄다는 소문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상상의 끝에 그녀가 있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뭐라고 멋대로 그의 사생활을 상상하고 싫다 좋다는 판단하는지. 연아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하마터면 재현을 앞에 두고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녀의 앞에 선 재현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추운데 이 옷으로 어떻게 걸으려고. 나한테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깊은 밤, 조용한 듯 화려하게 반짝이는 거리를 가로질렀다.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차로 향했다. 연아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운전석에 앉은 그는 히터를 최대로 틀고 나서야 액셀을 밟았다. 숨 막힐 듯 조용한 차 안에는 히터 소리만 들려왔다.
행사장을 박차고 나온 재현은 곧장 집으로 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적어도 그에겐 엉망이었다. 게다가 알고 싶지 않은 임다애 팀장의 마음까지 알아 버려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죄어 오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버리고 소파에 한참 앉아 있었다. 질투,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질투란 걸 하고 있다고 깨달은 순간 재현은 소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자신이 질투란 걸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집에서 정연아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전화 한 통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12시를 넘기는 순간 참았던 인내심도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 추운 밤에 길바닥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얼마 전에도 아파서 병원까지 가 놓고 왜 또 그러고 있는 건지! 도대체가 자신을 아끼지를 않는다, 이 여자는.
미친 듯이 차를 몰고 그녀가 있다는 곳으로 간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울컥 화부터 내버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해놓고 자신도 모르게 화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선 자신을 찾아도 되잖아. 데리러 와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두말하지 않고 갈 텐데, 왜 거기서 미련하게 그러고 있는지.
운전을 하는 중에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아까의 질투 때문인지 지금의 서운함 때문인지 알 길이 없는 재현이었다.
“왜 전화 안 했습니까?”
재현의 질문에 연아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왜 먼저 가셨어요?”
재현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힐끔 그녀를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운전 중이라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서 안달이 났다.
지금껏 그녀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으로 응수한 적이 있던가?
“저는…… 대표님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어서 전화 못 했습니다.”
담담한 음성으로 꺼내 놓은 연아의 말에 결국 재현이 길가에 차를 세웠다. 아예 몸을 반쯤 돌려 연아를 향한 재현이 물었다.
“무슨 시간?”
자신을 향해 묻는 그의 눈빛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서 연아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아까부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늘따라 차 안에는 그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아주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희미하고 불분명한 감정 한 줄기가 슬그머니 튀어 올라 심장 어딘가에 기생하고 있는 듯했다.
당황스럽다, 스스로에게. 먼저 갔는지는 왜 물었을까? 대체 뭐가 알고 싶어서?
연아는 이 당황스럽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을 꾹 밀어 눌렀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무슨 시간을 말하는 거지?”
아니라고 질문을 거둬들이는 연아에게 재현은 집요하리만치 다시 물었다. 연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현은 그런 그녀를 뚫어질 것처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나?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 놓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적어도 정연아에게는 쉬웠던 것 같은데. 틀려?”
단호한 그의 말투 사이에 섞여 있던 자신의 이름에 연아는 침을 삼켰다. 침을 삼켜 내도 목 안이 메말라 계속 간질거렸다.
“내가 무서워? 미치게 불편해? 그것도 아니면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재현의 말을 끊은 건 연아였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아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대표님.”
아니라고 하는 연아의 표정은 단호했다.
하…….
재현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히 아니라고 하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당장이라도 입술을 포개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자신이 본능에 충실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 연아가 입고 있는 자줏빛 원피스. 사실 재현은 그녀의 방문이 열리고 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본 순간부터 이미 연말 행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정연아를 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젠틀한 척했지만, 사실은 그랬다. 그걸 애써 누르고 눌러 행사장으로 향했는데, 고스란히 다른 놈의 손에 넘겨줘야 했다. 그때 자신의 기분을 정연아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추운 날씨에도 자신을 찾지 않은 서운함에 폭발해 소리까지 질러 놓고 어느새 또 사그라들었다. 고작 정연아의 아니란 말 한마디에.
서재현은 정연아에게 쉬워도 너무 쉽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정연아만 모른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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