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누마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는 잡아먹을 듯이 노트를 보았다. 거기에 쓰여 있는 기호들은 대부분 현대 수학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미지의 언어로 쓰인 노트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본 고누마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진짜인가?” 여태 침착하던 고누마가 몹시 당황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이번에는 구마자와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저도 여기에 쓰여 있는 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구마자와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방을 정리하다 노트를 발견하고 펼쳤는데 이 문장부터 눈에 들어왔다. 증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콜라츠 추측」중에서
구마자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네가 부러워. 질투도 하고 있어. 너 같은 재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거야. 네 재능을 돈으로 살 수 있으면 백만이든 천만이든 낼 거야. 억이라도 상관없어. 부모한테 손이 닳도록 빌어서라도, 사채를 써서라도 돈을 낼 거야. 내 수명이 10년이나 20년 정도 줄어들어도 괜찮아.” 두 사람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먼저 운 게 누구인지 료지는 몰랐다. “료지, 너는 일류 수학자가 될 거야.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운명이니까. 이제는 좀 인정해.” ---「광기의 증명」중에서
“아름다운 그림이네.” “이 도형, 망델브로 집합하고 식이 똑같아.” 료지는 또다시 논문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망델브로 집합’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가리켰다. 크고 작은 원들이 이어진 모양은 불타는 배 프랙털과 전혀 닮지 않았다. “두 도형은 실수부와 허수부를 절대치로 했는지 아닌지만 달라. 그런데 결과의 구조가 이렇게나 달라.” 료지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자연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구름을 표현한 식을 응용하면 파도가 될 수도 있어. 눈을 표현한 식을 변형하면 숲이 될지도 모르고. 기본식 하나에서 모든 것이 이끌어질 수 있는 거야. 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불타오르는 배」중에서
노트에 삐뚤빼뚤한 글자를 써나가는 료지의 뒷모습을 구마자와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보기 힘들다는 듯이 사나는 소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수학의 세계에서 ‘옳음’에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리 멋진 해법도, 참신한 발상도, ‘옳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래서 그때 한마디도 반론할 수가 없었다. 히라가가 보여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듯한 치밀함이 료지에게는 없었다. ---「옳은 사람」중에서
“그럼 이대로 너네 집에 갈까?” 말하면서 안색을 살폈다. 구마자와는 무뚝뚝하게 앞만 보았다. “오늘은 봐줘.” 벌써 반년이나 구마자와의 아파트에 가지 않았다. “귀찮게는 안 할게. 한쪽에서 책이나 읽을 테니까. 아, 맞다. 프랙털 해석법 개발에 진도가 좀 나갔거든. 꽤 그럴듯해졌어. 히라가 교수님은 이래저래 말하지만, 역시 프랙털에는 물리학의 관점도 필요해. 네 의견도 듣고 싶은데. 분명 끈 이론 연구에도 크게 도움이 될 거야.” 눈앞에 미끼를 던져보았지만 구마자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고, 구마자와는 더욱 깊이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풀비스」중에서
료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숲은 료지에게 멋지기 그지없는 정경을 맘껏 보여주었다. 풀숲을 지나자 시냇물이 나타났고, 시내를 건너뛰니 암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암벽을 끝까지 오르자 깊은 계곡이 펼쳐졌고,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오니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였다. 손을 뻗은 료지는 하늘 높이 한없이 올라갔다. 이윽고 별들에 둘러싸인 료지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이 거두어들였다. 어머니의 배 속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이게 불멸의 생명이구나. 더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시야가 온통 빛의 색으로 뒤덮였다. 영원한 시간이 료지에게 찾아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