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역할을 확실히 구분해 여성에게 ‘양처현모’의 덕목을 요구하는 근대 일본의 풍조에 동의할 수 없었던 우메코는 사회에서 남자와 동등하게 활약할 수 있는 여성을 배출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서는 여자를 위한 높은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 남다른 경험과 개인적 신념, 선구적 안목 등이 더해졌던 쓰다 우메코라는 인물의 생애는 근대 일본의 초기, 즉 1910년대 이른바 신여성들이 등장하기 이전 일본 여성들이 처해 있던 현실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물론 우메코 자신이 당시 일본 여성들을 대표하거나 상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시선에 비친 모습 혹은 그가 문제를 느끼고 변화시켜 보려 했던 상황을 통해 당시 일본 여성이 처한 현실과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때로는 안경 때로는 거울과 같은 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 p.75~77, 「제1장. 여자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도전」 중에서
(모성보호) ‘논쟁’은 출산하는 성(性)인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 문제, 즉 생명의 재생산과 생활 수단인 직업과의 양립이라는 오늘날의 문제를 가지고, 지금보다 약 한 세기 앞선 시기의 일본 여성들이 근대 일본 사회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잡지 저널리즘을 통해 벌인 대표적 논쟁이었다. 이것은 어리석은 여성이라는 전근대 시대의 여성 인식이 근대 이후 양처현모 양성이라는 여자교육 이념으로 변화하고, 이러한 교육에 답답함을 느껴 여성으로서의 문제점을 자각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등장이 다이쇼 데모크라시 및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급격한 산업 발달이라는 시대 변화와 맞물리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들의 ‘논쟁’은 계층과 시대를 넘어 모든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여성의 모성 실현과 경제적 자립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했던 작은 사건이었다. 논쟁의 내용뿐 아니라 각각의 참여자가 다소 과격할 정도의 설전을 벌임으로써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각자의 인지도도 높이는 부수적인 효과를 거둔 점도 평가할 수 있다.
--- p.119, 「제2장 여성 해방의 사상과 논쟁, 1918~1919」 중에서
‘협회’가 이루어낸 ‘치경법 개정’이라는 결과는 1924년부터 본격화하는 여성참정권 획득을 위한 여성운동의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정치 집회에 참석조차 불가했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제한적이기는 하나 의회 청원 성공의 경험은 여성참정권 획득이라는 보다 큰 꿈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협회’가 여성참정권 운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라이초의 제안을 받고 ‘협회’에 합류해 여성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던 이치카와 후사에의 존재 자체였다. 1923년 9월 간토대진재를 계기로 연대의 필요성에 공감한 여성들이 1924년 말 부인참정권획득기성동맹회를 발족시키는 등 여성참정권 운동을 향해 나아가는 중심에, 미국 체류 중 대진재의 소식을 듣고 귀국을 서둘렀던 후사에가 있었던 것이다.
--- p.174, 「제3장 여성운동의 조직화와 노선 갈등, 1919~1922」 중에서
아마도 여성들에게 ‘제도부흥’은 더 이상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도시 재건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자 여성으로서 품고 있던 이상적 생활의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희망이 되었던 듯하다. 그들은 제도부흥에 대한 여성으로의 요구를 확실히 함으로써, 종래의 불합리한 모든 조건을 제거하려는 바람을 드러냈다. 따라서 ‘대진재’ 직후 제도부흥을 향해 여성들이 쏟아내는 주장을 통해, 1910년대에 등장한 신여성뿐 아니라 그리스도교계, 나아가 사회주의계와 보수 중류 계층 여성들이 품고 있던 구체적인 요구와 욕망의 내용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본격적인 여성 연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923년 시점에서 다양한 입장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궁극적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지향하는 방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제도부흥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란 사실상 당시까지 여성계가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던 각종 문제의 총결산인 셈이었다.
--- p.207~208, 「제4장 여성과 ‘제도부흥’, 1923~1924」 중에서
근대 일본에서 ‘생활’은 그 자체가 여성과 정부, 혹은 지자체 등 공적 기관이 연결될 수 있는 현안이 될 수 있었다. 주부들이 자신이 책임진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생활 개선에 매달릴 때, ― 간토대진재 이후 도쿄의 사례에서 보듯 ― 지자체는 도시의 구획과 유통, 환경 등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생활공간을 만들기 위해 부심했다. 여성들이 소비자로서 생활의 문제에 착목할 때, 이를 수용해 시정에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지자체에 접근해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편으로 정부는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가장 중심의 가정을 단위로 삼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나아가 그 가정의 가장과 자녀를 효율적으로 전시에 동원하기 위해서라도 가정의 생활과 경제를 책임진 주부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 p.231, 「제5장 여성참정권 운동과 정당정치, 1924~1932」 중에서
근대 일본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란, 당시 정계의 변화 특히 주요한 대화 상대였던 정당정치의 와해·붕괴에 이은 총동원 체제에 대응해 전략을 수정해 가는 가운데 일종의 자기모순 혹은 딜레마에 빠져갔던 것처럼 보인다. 본래 부선운동이란 정당과 의회, 혹은 정당내각과 의회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해 여성의 의회 진출을 목표로 했던 것이었다. …… 후사에를 비롯한 ‘동맹’의 여성들은 참정권 획득을 통해 자신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공헌할 것을 희망하며 부선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지만,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시 비상시국이라는 상황 속에 ― 의회 민주주의의 일익을 담당하려던 ― 본래의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에게 허용된 ‘참정’이란 자신들이 나아갈 바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수반하지 않는 것, 즉 ‘참정권’이 아닌 ‘참정’만이 제한적으로 허용된 결과였다. 그러나 설령 ‘무권자’로서 참가한 참정이었다고 해도 전후 그 책임에 대해 추궁당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 p.305~306, 「제6장 여성참정권 운동의 딜레마, 1932~1945」 중에서
여성들의 갑작스러운 정치 참여에 대한 우려는 ≪부인공론≫의 필자로 나선 이른바 ‘진보적인’ 남성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 예를 들어 법제사학자 후지타 쓰구오는 신헌법 제정에 따른 여성 해방의 의미를 긍정하면서도, 이것이 “[일본] 부인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다년에 걸친 자유 획득[을 위한] 노력의 성과」 중에서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성 해방에는 ‘취약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분간 여성의 지위 향상에 적지 않은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 p.328, 「제7장 ‘여성 해방’의 현실과 이상, 1946~1950」 중에서
전후 일본 여성들의 평화운동은 1954년의 비키니사건 발생 이전부터, 즉 패전 직후부터 이미 여성운동가들에 의해 시작되어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국제적 연대를 시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 전전의 여성운동이 대부분 엘리트 여성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과 달리, 전후의 모친운동은 ‘지극히 보통’의 ‘모친’들이 중추가 되었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좁은 의미에서의 ‘평화’가 ‘모친운동’의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지만, ‘아이’와 ‘생활’과 더불어 모친운동의 주된 목표의 하나이자 바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위치를 점했다. 즉, ‘아이’와 ‘생활’을 위협하는 문제는 ‘평화수호’의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응하지만, 평소의 주된 관심은 오히려 소소하고 또 피부에 와닿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와 실천에 놓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 p.386~387, 「제8장 전후 일본의 각성하는 모성과 평화」 중에서